[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2-21 01: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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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가보지 못했지만 가우야 강 건너에는 ‘투르이다의 장미’전설에 등장하는 빅토르스 헤일스가 정원사로 일했다는 시굴다 성(Siguldas pils)이 있다. 현존하는 시굴다 성은 시굴다 신성(新城; Siguldas jaunā pils)이라고도 하는데, 1878년에 시굴다 중세 성이 있던 지역에 건설됐기 때문이다. 

디미트리 크로포트킨스 공작과 공장부인 올가(Duchess Olga and Duke Dimitry Kropotkins)가 체시스(Cēsis)의 건축가 야니스 멩겔리스(Jānis Mengelis)에게 건축을 맡겨 1878~1881년 사이에 지었다. 멩겔리스는 17세기부터 있던 옛 건물의 자재를 이용해 신고전주의 양식의 시굴다 신성을 건축했다.

성의 구조나 모양은 간단하지만 고딕양식의 건축학적 가치와 부서진 바위의 색조를 성공적으로 활용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성의 창문에서 바라보면 시굴다 중세 성의 성터를 포함해 가우야 계곡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멀리 크리물다 성(Krimuldas pils)과 투라이다 성(Turaidas pils)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피해를 입었다. 전후에는 작가와 언론인 연합이 복원해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는 독일군 북방 사단의 본부로 사용됐다.

‘투라이다의 장미’전설과 연관이 있는 시굴다 중세 성(Siguldas viduslaiku pils)은 시굴다시의 북서쪽 끝에 있는 인민공원(Tautas parks)에 있다. 1207~1209년 사이에 ‘칼의 형제 기사단(Zobenbrāļu ordeņa)’의 최고지도자 벤노(Venno)의 영에 따라 지은 작은 요새였다. 칼의 형제 기사단은 이곳을 근거로 삼아 리보니아인들과 맞서 싸웠다. 나중에는 수녀원 건물로 사용하다가, 1432년부터는 리보니아 기사단의 최고지도자가 사용했다. 

1562년부터 리보니아 공국에 속하게 됐다. 16세기 말에는 폴란드 사람들이 성과 주변 건물을 보수했지만, 폴란드–스웨덴 전쟁 중에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스웨덴 사람들은 성이 비어있고, 파괴됐다고 기록했다. 1622년 성을 복원했지만, 17세기 말부터 폐허가 돼갔다. 

1737년에 러시아제국의 안나 이바노바(Анна Иоанновна) 여제가 시굴다 중세 성을 페트르 페트로비치 라시(Пётр Петро́вич Ла́сси)장군에게 하사하면서 사유지가 됐다. 19세기 들어 성터의 외곽에 시굴다 신성을 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성은 상당한 정도로 손상됐다. 1987~1988년 사이에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됐다.

10시 40분 마야와 빅토르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안타깝게 서려있는 구트마니스 동굴을 떠나 투라이다 성(Turaidas pils)으로 향했다. 널찍한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주차장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이어져있다. 특히 린넨 제품을 많이 팔고 있었다. 

큰 도로를 건너 관리소를 지나 투라이다 성으로 향하다보면 왼쪽 언덕 위에 작은 교회가 있다. 투라이다 에반젤리칼 루터란 교회(Turaidas evaņģēliski luteriskā baznīca)다. 오전에 들른 구트마니스 동굴에서 들었던 투라이다의 장미, 마야가 묻혀있는 곳이다. 

교회가 있는 언덕(Baznīckalnā)은 13세기부터 세례를 받은 리보니아사람과 교회신도들을 매장하던 곳이다. 하지만 1772년 러시아제국의 에카테리나 2세 여제(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가 교회 부근에서 죽은 자의 매장을 금지했다. 

투라이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1582년 기록에 따르면 투라이다 성 앞에 교회가 있다고 언급돼있다. 하지만 이 교회는 리보니아 전쟁 중에 불탔고, 1619년에 새로운 목조 교회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길이 17m, 폭 10m의 1실 건물의 목조로 된 지금의 교회는 1750년에 지은 것으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 가운데 하나다. 리엘바르데(Lielvārde) 목사 야콥스 안드레아(Jakobs Andrea)에 의해 봉헌됐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종탑은 1808년에 세워졌는데, 그 전에는 교회 밖에 세운 통나무에 매달았다. 

교회의 내부는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 제단에는 17세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작품 ‘골고다(Golgāta)’가 제단화로 걸려있다. 1920년대 들어 존 리버 사이드 (John Riverside)의 작품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Jēzus Ģetzemanes dārzā)’를 왼쪽 벽에 걸었다. 

교회를 지나면 널따란 초원이 펼쳐진다. 다이누 언덕(Dainu kalns)에 있는 민요공원(Tautasdziesmu parks)이다. 크리샤니스 바론스(Krišjānis Barons)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1985년에 개장한 공원이다. 1835년 라트비아의 투굼스 가까이 있는 스트루텔레(Strutele)에서 태어난 크리샤니스는 21만7996개의 라트비아 민속음악을 수집하여 체계화한 공로로 ‘노래의 아버지(Dainu tēvs)’로 존경받고 있다. 

공원에는 조각가 인둘리스 랑카(Indulis Ranka)가 조각한 26개의 돌조각 작품이 설치돼있다. 작품들은 라트비아의 민요와 라트비아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다. 노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크리샤니스 바론을 비롯해 양봉가·린넨·모녀·세 자매·사랑·태양에 대한 헌신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과 자연을 위한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민요공원에서는 다양한 축제들이 열린다.

민요공원을 지나면 투라이다 성(Turaidas pils)이다. 가우야 강 건너 시굴다 쪽에서 바라보면 투라이다 성은 나무 숲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붉은 배를 닮았다. 성문이 있는 문루(門樓)가 배의 앞부분을 나타내고, 가장 높은 주탑이 돛대의 형상이며, 남쪽 전망대가 배의 뒤쪽을 구성한다. 

투라이다 성은 2014년에 지어졌다. 이에 앞서 이 지역을 장악하던 리브(Livs) 부족은 2006년에 리가 남쪽에 있는 살라스필스(Salaspils)에서 벌어진 전투와 투라이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게르만 기사단에 패배했다. 그 결과로 리브부족의 영주 카우포(Kaupo)가 가우야 강의 서쪽 땅을 할양하게 된 것이다. 

이에 1210년 로마 교황 이노첸시오 3세와 리보니아 주교 알브레히트 폰 벅스퇴벤(Albrecht von Buxthoeven; 리가 돔에서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리보니아의 검의 형제 기사단 사이에 맺은 리보니아 분할협정을 맺게 됐다. 리보니아 분할협정에 따라 농지를 빼앗긴 농부들이 1212년 알브레히트 주교와 형제의 검 기사단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다. 

시굴다의 사테젤레(Satezele) 성을 중심으로 한 아우티네스(Autines) 봉기 과정에서 카우포 영주 시절 목조로 건설했던 투라이다 성이 불탔다. 1214년 알브레히트 주교는 투라이다 성을 석조로 재건할 것을 명했다. 이렇게 지은 성은 ‘평화의 땅’이란 의미로 프레데란트(Fredeland)라고 불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르신의 정원(dieva Tora dārzs)이라는 뜻을 가진 투라이두(Turaidu)로 바뀌었다. 

성은 발트해 십자군 기사단의 전통에 따라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성의 방어체계를 개선하는 공사는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됐다. 14세기에는 남쪽 탑을 지었고, 15세기 초에는 총안을 넣은 반원형의 서쪽 탑을 세웠다. 주거시절도 성 안마당에 세웠다. 

17세기 들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사라졌지만, 소소한 재건 작업이 수행됐다. 그러나 1776년에 화재가 발생한 뒤로 버려지면서 점차 폐허가 됐다. 20세기 초반에는 방어벽의 일부와 건물(주탑과 반원형의 서쪽 탑)만 남았다. 1976년부터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되면서 성의 초기 모습을 밝히는 복원 및 보존 작업이 이뤄졌다.

초원을 지나 키가 높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커다란 반원형의 벽돌탑이 나오고 그 뒤로 원뿔 지붕을 쓴 높은 원통형의 탑이 나온다. 투라이다 성의 주탑이다. 30m에 달하는 탑을 구성하는 벽돌이 층에 따라 다른 것을 보면 이 탑이 시차를 두고 증축됐음을 나타낸다.

성탑을 무너뜨리려고 발사한 포탄의 쇠구슬이 점점이 박혀있다고 하니 찾아볼 일이다. 탑의 바깥지름이 13.3m이나 안지름이 6.7m인 것을 보면 벽의 두께가 3m를 넘는 듯하다. 포탄의 쇠구슬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탑 안으로 들어서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띄지 않는다. 벽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서 계단을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이 벽에 숨겨져 있는 독특한 구조다. 

종탑의 내부 구조는 단순하다. 중간참의 천정은 두터운 대들보로 받쳐 위층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맨 위층에 오르면 고깔 모양의 지붕을 씌우기 위해 목재를 정교하게 짜 맞춘 것을 볼 수 있다. 탑의 벽에 뚫어놓은 전망창을 통하여 내다보면, 지나온 초원을 둘러싼 숲이 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뱀처럼 휘감아 흐르는 가우야 강에 연한 성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채의 서쪽 건물은 복원돼있지만, 동쪽 건물은 토대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협소한 느낌이 들어 성채에 주둔한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현재 성채의 서쪽 건물은 박물관으로 운용하고 있는데, 옛날 사용하던 갑옷과 무기류를 비롯해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일상의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실은 감옥으로 사용한 모양으로 관련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11시50분에 약속장소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시굴다 시내에 있는 파젠다 바자르스(Fazenda bazārs)라는 식당이었다. 점심으로 나온 닭고기 요리는 특별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떠먹는 아이스크림은 인상에 남았나보다. 피나 콜라다(pinã colada)라고 했던가? 필자가 이름까지 메모에 남겨둔 것을 보면 말이다.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러 나가면서 보니 식당건물이 독특한 모습이었다. 완만하지 않은 지붕이 꽤나 길어 키가 큰 사람이면 처마에 손이 닿겠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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