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의 클라쓰 [TV봤더니]

'이태원 클라쓰'의 클라쓰 [TV봤더니]

기사승인 2020-02-28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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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JTBC ‘이태원 클라쓰’의 오수아(권나라)와 조이서(김다미)는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 주인공 박새로이(박서준)를 만나게 된다. 악연으로 시작된 첫 만남이 여러 번의 우연한 만남을 거쳐 인연이 되는 흐름이다. 정반대 성격의 두 여주인공은 결국 같은 이유로 박새로이를 좋아하게 된다.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로맨스 드라마 공식이다.

박새로이 입장에서 보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만남에서 박새로이가 목격한 건 노숙자 할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는 오수아와 나이든 아주머니의 뺨을 때리는 조이서의 모습이다. 박새로이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지나가던 고등학생 오수아의 손목을 갑자기 잡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고등학생 조이서가 자신의 딸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아주머니가 그녀의 뺨을 때리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순간이지만, 박새로이는 망설임 없이 끼어들어 둘의 행동을 다그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이가 어린 사람(혹은 여성)이 어른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장대희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겐 소신을 굽히지 않고 조이서 등 젊은 세대에겐 일종의 멘토로 존재하는 박새로이 캐릭터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같은 과정을 거쳐 인연을 맺었지만, 두 여성을 대하는 박새로이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오수아에겐 15년 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자신의 반대 세력 편에 있어도 “넌 네 삶에 최선을 다한 거고 잘못이 없다”는 응원을 보낸다. 조이서에겐 갓 스무 살 된 꼬맹이로 대하며 “한 마디만 더 하면 혼난다”고 다그친다. 박새로이에게 동갑인 오수아는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같은 위치에 있는 인생의 동반자인 동시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마지막 여성이다.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조이서는 자신의 사업을 도와줄 뛰어난 능력의 조력자이지만, 교화가 필요한 대상이고 자신의 인생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박새로이에겐 혈연과 나이가 인물 본연의 매력보다 더 우선하는 요소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는 장가포차와 단밤의 차이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태원 클라쓰’는 4회까지 기성세대(아버지 제외)를 상징하는 요식업계 1등 프랜차이즈 기업 장가와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이태원 포차 단밤의 대립을 다룬다. 장가의 세계는 경쟁과 승리를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약육강식의 공간이다. 더 경험이 많고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 가진 것 없고 부족한 젊은 사람이 무릎을 꿇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장가의 사람들은 옛날 만화에 나올 법해서 웃기기까지 한 고리타분한 대사를 진지하게 읊는다. 반대로 단밤의 세계는 젊고 가볍고 쿨한 웹툰의 세상을 지향한다. 경쟁보다는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서로간의 신뢰를 귀하게 여긴다. 일하는 데 지장이 없다면 인종과 성별, 나이, 성적 정체성은 상관없다. 실력이 부족하면 기회를 준다. 현실적인 대화는 직원들의 사생활을 공유하지 않는 선에서 멈춘다.

두 세계에 모두 속한 박새로이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는 혈연과 나이라는 기성세대가 중시했던 요소를 체화한 인물이다. 더 강해져야 하고 장가를 이겨야 하는 박새로이의 모습은 장대희(유재명)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또 젊은 세대가 중시하는 다양한 가치관과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받아들였다. 단밤의 직원들은 기성세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박새로이에게 끌려 일을 시작했다. 정작 중간에 낀 박새로이에게 중요한 건 단밤을 최고의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자신의 목표다. 그에겐 분명한 목표와 노력할 의지가 충분하지만, 스스로 성장하거나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오수아와 조이서가 훨씬 매력적이고, 두 사람이 충돌하는 장면이 매우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태원 클라쓰'의 클라쓰 [TV봤더니]

‘이태원 클라쓰’의 높은 인기는 강력하고 원숙한 스토리텔링과 쉽고 개성강한 캐릭터라는 만화적인 특징에서 나온다. 장가와 단밤의 세계관을 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해 나갈수록 드라마의 전체의 세계는 탄탄해지고 재미있어진다. 박새로이가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 이길 거라는 만화 같은 확신은 드라마의 주요 동력이 된다. 이는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요즘 대중의 입맛에 잘 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기 웹툰의 서사를 그대로 이식한 ‘이태원 클라쓰’는 1시간이 넘는 드라마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성공적인 대안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웹툰의 부작용도 함께 가져왔다. 만화적인 설정과 주인공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눈 감고 넘어가야 할 여러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드라마는 ‘각자의 가치관으로 이태원 거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기획 의도와 달리, ‘각자의 가치관’은 잠깐 언급만 될 뿐 제대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네 얼굴 보고 손님들이 오겠다”는 외모비하와 혼혈에게 “한국사람 아니잖아”라는 인종비하 발언이 등장한다. ‘내 사람’을 아낀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내 사람’에게 소리 지르고 매니저 명찰을 뺏는다. 과연 박새로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시청자들은 ‘이태원 클라쓰’에 얼마나 공감하고 동의하면서 보는 걸까.

bluebell@kukinews.com / 사진=JTBC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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