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당(耕雲堂)에서] 임명진 에세이(2) ‘코로나’ 못지않게 위중한 것

입력 2020-02-28 14: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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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진 (문학평론가·전북대 명예교수)

◆ 엊그제 봄을 재촉하는 비가 하루 종일 촉촉이 내렸다. 방미산 응달에 남아있던 잔설이 녹아 산기슭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그 눈 녹인 빗물이 골짜기로 모여 작은 실개천으로 흘러내려 필자가 기거하는 경운당(耕雲堂) 앞에 이르러서는 제법 졸졸거리면서 서둘러 강 쪽으로 달려간다. 이번 비로 이미 피어난 봄까치꽃과 복수꽃 색깔이 더욱 선명해지고, 화단·텃밭 구석에는 수선화·접시꽃·초롱꽃·상사화 새싹이 서너 치 솟았다. 마당 저쪽에 서 있는 매실나무와 산수유의 꽃망울도 동글동글 부풀어 올랐고, 그 발치에선 쑥이 새싹을 쑤욱 내밀었다. 
시선을 들어 저만치 강변으로 돌리면, 오원강(전북 임실군 관촌·신평면을 관통해서 흐르는 섬진강 상류를 따로 일컫는 강 이름) 강물이 좀 불어난 것 같고, 강기슭의 버드나무 숲엔 연두 빛이 감돈다. 강물 위를 나르는 쇠기러기·청둥오리·흰죽지 등 철새들의 북녘 땅을 그리는 날개 짓도 더욱 힘차다. 온 천지가 새봄을 맞이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저 방콕(?)만 하기에는 좀이 쑤셔서 텃밭에도 서성거려보고 강변을 거닐어보기도 한다. 
정녕 봄이 오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있다. 그러나 올봄을 맞는 마음은 적잖이 심란하다. 온 나라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면서 그 와중에 봄맞이 설레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 텔레비전의 뉴스는 온통 ‘코로나’로 도배되었고, 자고 일어나면 수백 명의 확진자가 늘어나는 상황이어서 뉴스 듣기도 은근히 겁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여느 해에도 봄을 맞을 때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을 입줄에 올리곤 했었지만, 올해만큼 그 시 구절의 속뜻이 더욱 실감난 해도 없을 것 같다.1)

1) 흉노족 군주 호한야의 후처로 팔려간 한(漢)나라 원제의 후궁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에서 유래함.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 봄은 와도 봄 같지 않네 / 저절로 (왕소군의) 허리끈이 느슨해지니 / 날씬한 허리 맵시를 위한 것은 아니라네. (胡地無花草 / 春來不似春 / 自然衣帶緩 / 非是爲腰身.)

암튼, 지금 온 국민들이 기대해 마지않는 바는, 이 바이러스가 어서어서 잠잠해져서 다음 달 춘삼월에는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꽃구경 나들이를 실컷 해보는 것이렸다.

◆ 허나, 코로나 바이러스 등쌀로 묻혀버린 일들이 이 초봄의 설레임만은 아니다. 
몇 주 전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방탄소년단’ 등의 K팝에서 이루어낸 한국 대중문화의 위력이 영화에서도 실증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이 영화를 다시 보며 김구 선생께서 『백범일지』에서 소원하신 “높고 새로운 문화”를 환기하였다. 우리나라 문화(비록 대중문화이기는 해도)의 힘이 세계 수준에서 어깨를 겨루는 이 사건(?)을 선생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또한 봉 감독이 겸손하면서도 자신 있는 태도로 위트가 있으면서도 무게를 잃지 않는 인터뷰를 잘 소화해내는 과정을 보면서 명장(名匠)의 품위에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필자의 심사를 건드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미국 현지에서 기자회견하는 자리에서 어느 미국 기자가 ‘왜 이 영화를 한국어로 만들었나요?’로 묻자, 봉 감독이 ‘그 질문은 미국에서 왜 영화를 영어로 만들었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대답하였다는 소식이 내 마음을 편치 않게 하였던 것. 물론 봉 감독의 대답은 미국 기자의 질문을 우문(愚問)으로 만들어버린 매우 효율적인 재치로 평가할만하지만, 그런 우문을 서슴없이 해내는 미국 기자의 오만이 내 심사를 건드린 것이다. 그 기자의 속내에는 아마도 이런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인 권위의 작품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면 당연히 영어로 만들어야한다는 그런 ……. 
그 기자의 무의식 저변에 영어 패권주의, 또는 미국패권주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서슴없이 입 밖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정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필자가 이런 방면에 민감하여서 그리 생각한 것은 아닌가하는 작은 반성(?)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반성은 처음부터 할 필요도 없었다는 더 큰 반성을 하도록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지난 21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올해 아카데미상은 한국 영화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며 “그들(한국)은 무역에서 우리를 때리고 미친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탔다”고, 또 그 하루 전에는 콜로라도에서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느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선셋 대로」 같은 미국 영화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두 번이나 한국영화 아카데미 수상을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그 자리가 투표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유세 현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허구헌날 ‘동맹’을 외치는 미국의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한국영화를 비난한 것은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끼친/끼치는 영향력은 막중하다. 미국 대통령의 견해와 판단이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광복 후 좌우합작 좌절, 미군정 시행, 한국전쟁 정전, 월남 파병, 미국식 신자유주의 도입, 사드 배치, 지소미아 파기 유예 등은 우리의 의사와는 달리 주로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부합해 온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광복 후 현대사에 얼룩진 사건 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1905년 이른바 ‘테프트-가쓰라  밀약’이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2)

2)1905년 7월, 미국 육군성(국무성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테프트(William.H.Taft)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겸 외상 가쓰라다로桂太郞가 극비리에 만나 맺은 협정을 가리킨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를 교두보 삼아 본격적으로 조선의 식민화에 나섰다. 청국과 러시아 세력을 제압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양해만 받으면 조선의 식민화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반면 아시아에 이미 많은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이에 제1·2차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요구를 인정해주었다. 한편 필리핀과의 긴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미국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와 일본의 필리핀 침탈을 봉쇄하기 위해서 조선을 일본에 양보하는 대신 필리핀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당시 미 대통령인 루즈벨트는 1905년 테프트를 일본으로 보냈고, 그는 7월 29일 가쓰라와 만나 극비리에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은 조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합의 각서’(Agreed Memorandum)의 형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협정이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으며,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②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영·일 3국은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인한다.
    ③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
     이 밀약은  후에 '이승만 전기'를 쓴 로버트 올리버(Robert.T.Oliver)에 의해 “한국의 사망증서에 날인”하는 행위로 평가되었다. 이 내용을 보고 받은 루즈벨트는 즉시 테프트에게 전문을 보내어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합의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하였다.

이 밀약은 1908년 루트-다카히라 협정(Root-Takahira Agreement)으로 공식화되었다. 그 무렵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의 중재에 나서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이끌어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아무튼 루즈벨트가 미국에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해마다 국방 예산의 증액을 요구했으며, 의회로부터 군함의 건조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국제분쟁사태의 심각성을 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최고수준으로 올랐다. 이런 군사력을 앞세워 대내적으로는 자본가들의 트러스트를 타파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킨 ‘공평정책’을 펴기도 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약소국을 강압해가는 이른바 ‘큰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을 견지해간 것.
국제문제에 있어 루즈벨트는 약한 나라는 망하고 강한 나라는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속담을 인용하여, 외교문제를 수행하는 올바른 방법은 "부드럽게 말하며 큰 몽둥이를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루즈벨트는 1903년 콜롬비아가 가지고 있던 파나마 운하 지대를 획득할 때, 1905년 도미니카 공화국에 압력을 넣어 미국인을 '재정 감독'으로 임명할 때, 그리고 1906년 쿠바의 임시정부를 세울 때, 예의 ‘큰 몽둥이 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약소국들에 대한 루즈벨트의 태도가 강압적이었다면 강대국들과의 협상은 훨씬 더 조심스러운 것이 특징이었다. 1903년 루즈벨트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평화로운 지배를 계획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회담을 주선하여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통하여 미국의 국익을 도모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의 꾸준한 세력증대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05년 ‘테프트-가쓰라 밀약’은 아시아·태평양 정책의 변화 양상의 일환으로 도모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특사들이 미국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 관리들이나 선교사들은 매우 부드러운 태도를 견지하였지만, 헤이그에 파견된 미국대표의 태도는 완연히 달랐다. 헤이그의 미국 대표는 영·불·러·일 등의 강대국들의 대표들은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조선의 대표에게는 매우 냉담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그 냉담성 뒤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미 확인된 ‘큰 몽둥이 정책’의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루즈벨트의 ‘큰 몽둥이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신 정당에 따라서, 상황의 국면에 따라서 그 방식은 다르지만, 미국 대통령의 손에서 ‘큰 몽둥이’가 내려진 적은 없었다고 여겨진다. 

◆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 정책을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대북·중동정책이 그 적실한 증좌이고, 한국과의 소파 협상에서 다섯 배 넘게 인상을 요구한 것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트럼프는 자신이 들고 있는 몽둥이가 너무 커서 혼자 들기 힘드니 우리더러 함께 들자고 한다. 그의 손에는 이제 혼자서 감당키 어려운 너무 거대하고 무거운 몽둥이가 들려져 있나보다.  
미국은 우리에게 부드럽게 ‘동맹’을 말하면서 함께 들자고 종용하지만, 우리는 다시는 미국의 몽둥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월남 파병의 역사적 교훈이 그 부당성을 말해준다. 트럼프는 혼자 들기 힘들면 그 몽둥이를 내려놓으면 된다. 
최근 우리나라 집회에서 미국 국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눈에는 트럼프의 몽둥이를 함께 들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게 단지 나만의 착시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착시가 아니라면 지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못지않게 위중한 것이다.     (2020.02.27.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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