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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1년…애월의 금산공원과 복덕개포구와 곽지-한담 해변길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서른여섯 번째

기자입력 : 2020.03.21 00:00:00 | 수정 : 2020.03.27 15:34:06

납읍초등학교가 가까워지면 마을 가까이에 느닷없이 웅장한 숲이 나타난다.

문득 생각나는 제주 모습 중 하나가 비석이다. 중산간 지역의 길가엔 전기 가설공사 기념비가 있고 마을회관엔 마을회관 건립 기념비와 건립비용을 댄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공덕비가 있다. 어느 마을에선 그 마을의 역사를 소개한 책 발간 기념비도 세웠다. 마을회관, 마을의 복지회관, 사무소는 물론 공터 한구석에도 비바람에 깎인 비석부터 며칠 전 새로 새운 듯 매끈한 비석까지 온갖 비석들이 보인다. 수십 개의 비석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모습이 얼핏 마을마다 비석 세우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납읍리의 금산공원은 천연기념물 제375 호로 지정되어 있는 난대림 곶자왈이지만 입구에 서면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군 고목이 마치 파수꾼처럼 서 있다.

한 걸음 더 나가보면 제주도 곳곳에 4.3 사건 관련 위령비도 많다. 제주시 봉개동엔 ‘제주4.3평화공원’이 있고, 조천읍 북촌에 가면 너븐숭이4.3기념관이 있다. 광치기해변에도 위령비가 서 있고 서귀포 천제연폭포 부지에도 위령비는 서 있다. 대정읍 섯알오름에도 [4.3유적지 섯알오름 학살터] 조형물이 서 있다. 중산간 지대든 해변 마을이든, 오름이든 숲속 자연동굴이든 가는 곳마다 4.3 사건과 관련된 크고 작은 안내판과 조형물을 만난다.

약 33,000 제곱미터의 금산공원엔 200여종의 난대 식물이 터를 잡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마음의 준비도 채 되기 전 한 순간 깊고 깊은 숲속으로 풍덩 빠진다.

4.3 사건을 그만 잊자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다. 그러나 큰 돈 들여서 위령비 세우고 그 한 귀퉁이에 잘 읽을 수도 없는 글씨로 그곳의 비극을 이야기한들 누가 애써 읽으려 하겠는가. 일 년이 가도 이 년이 가도 찾는 이 몇 되지 않을 듯 보이는 외진 곳에 큰 돈 들여 복원한 4.3 사건 관련 유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금 더 의미 있게 돈을 쓰자는 말이다.

한 때는 정자가 있었다는 이곳에 지금은 납읍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글과 그림 작품을 걸어 찾는 이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어른들이 ‘내 아이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것보다 더 보기 좋은 것은 없다’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 수발을 하며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행복했다. 편안하고 좋은 집도 아니고 월세 아파트였지만 사는데 불편함 없었고 음식이라고 하기는 어설프지만 내 손으로 준비한 초라한 상 앞에서 저리 맛있게 드시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끝이 어디인가 싶은 깊고 깊은 숲길을 걷는다. 여름이면 나뭇잎이 우거져 단 한 줄의 빛도 들어오기 어려우니 이 숲에선 한낮에도 더듬더듬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평생 자식 셋 먹이고 가르치느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처음 보는 열대과일도 가끔 맛보고, 가을이 깊어가며 그리 좋아하시던 홍시도 편하게 드실 수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내가 사들고 들어온 홍시를 보고 ‘맛있겠다. 먹어보자’하며 침을 꼴깍 삼키시던 모습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해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버릇처럼 홍시를 사 냉동실에 넣곤 했다. 지금도 가을이면 다 먹지도 못할 만큼 홍시에 욕심을 낸다.

영등할망이 들어온다는 복덕개포구를 향해 북쪽으로 가다가 가장 처음 만나는 영등좌수다. 풍류를 좋아해 한라산에 꽃을 피우고 들에 곡식을 파종하는 곡물 신이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나가는 듯했지만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가 귀찮아 할 정도로 자주 물을 달라고 보채곤 했다. 문득 ‘다갈, 다음, 다뇨’가 생각났다. 당뇨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상태이니 단순히 외래 진료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을 했다. 타의에 의한 퇴직이었지만 향후 5년 동안 부모님 진료는 병원 근무할 때와 동일하게 예우한다는 조건이 있어 다른 사항은 개의치 않았는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침상생활 3년이 지나가며 어머니의 건강이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영등우장은 비를 관장한다. 영등할망이 일으키는 칼바람에 비우 (雨) 자 색깔을 입히고 궂은 비 내리는 날씨에 대비해 비옷까지 입고 온다.

때로는 숲에 들고, 마을 골목을 지나기도 하고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며 제주 생활 9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곧 올레 전 코스 걷기가 마무리된다. 제주시와 서귀포를 세로축으로 하고 서쪽에서 동쪽을 가로축으로 삼아 제주도를 4등분해서 올 때마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다니면 멀리 이동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제주를 즐길 수 있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의 느낌이 미묘하지만 다르다. 걸으며 보니 토양에 따라 재배하는 작물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등할망이 제주도에 딸을 데리고 올 때는 ‘이 꽃 보세요, 저 꽃 보세요’하는 딸의 고운 모습에 마음이 흡족해서 바람을 빨리 거두고 봄도 일찍 온다.

영등하르방 (왼쪽)은 음력 2월 초하루 제주를 찾아오는 영등할망 (가운데)의 바람주머니에 오곡 씨앗과 꽃씨를 담아준다. 영등할망이 음력 2월 1일 이곳 복덕개포구를 통해 제주에 와서 영등바람을 뿌리고 15일에 동쪽 끝 우도를 거쳐 제주를 떠나며 제주의 새 봄을 준비하는 동안 영등대왕 (오른쪽)은 세상의 북쪽 끝에 있는 영등나라에서 긴 겨울을 지키는 외로운 대왕이다.

애월은 가서 볼만한 곳이 많은 지역이다. 중산간 지대의 보기 드문 곶자왈 공원인 금산공원은 기대 이상의 눈부신 숲이다. 납읍초등학교 정문 옆에 입구가 있는 이 공원은 그 식생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중인 숲이다.

영등할망은 며느리를 질투하고 싫어하지만 착한 며느리는 할망의 기분을 다 맞춰준다. 착하고 부지런하고 어질고 반듯한 영등며느리는 바다에 들면 전복, 소라, 미역을 비롯해 각종 해초의 씨를 뿌려주는 해녀의 수호신이다.

영등호장은 성깔 없고 무게 없는, 영등바람 같지 않은 바람이다. 영등할망이 매운바람과 함께 마지막 꽃샘추위를 제주에 뿌리기 전에, 호장은 너무 빨리 햇빛을 내리고는 날이 덥다며 사람보다 먼저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온다. 옷 벗은 영등이 오면 여름이 빨리 온다.

멀리 한라산 쪽으로 9km쯤의 거리에 있는 노꼬메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흐르다 금산공원에서 33,000 평방미터의 돌무더기를 남겼다. 그 돌무더기에 이끼가 자라고 덩굴이 뻗어나고 낙엽이 쌓이다가 그 낙엽 틈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도토리를 맺는 종가시나무와 함께 후박나무, 아왜나무 등 약 200여 종의 아열대식물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영등할망이 음력 2월 초하루 새벽 물때에 이곳 복덕개포구로 들어오며 귀덕 앞바다에 많은 씨종자를 뿌린다.

도무지 숲을 기대하지 않고 길을 걷다가 납읍리 마을 입구에서 갑자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빽빽한 숲이 나타난다. 예사롭게 넘기고 지나가기엔 그 숲 가장자리의 나무들 자태가 훌륭함 이상이다. 납읍초등학교 앞에 서서야 금산공원임을 알게 된다. 숲속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30분 정도 걸으며 곶자왈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곽지해변까지 불과 3.3km 떨어져 있으니 부담스럽지도 않은 거리다.

영등별감은 어부를 위해 바다에 물고기 씨를 뿌려준다. 영등별감은 창과 방패를 가지고 있어서 바다에 불어오는 태풍을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막으며 배를 보호한다. 그러나 화가 나면 폭풍을 몰고 와 배를 부수는 풍랑의 신이기도 한다.

귀덕리항은 그 오른쪽의 곽지해수욕장과 한담까지의 해변산책로가 워낙 이름이 높아 상대적으로 찾는 이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제주도에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곳이다.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루 영등할망은 영등대왕 등의 일행을 거느리고 이곳 귀덕리의 복덕개포구를 통해 제주로 들어와 보름에 동쪽의 우도로 빠져나간다.

곽지해수욕장을 지나 한담해변까지 곽지과물해변산책로로 시작해 장한철산책로라는 이름으로 끝나는 바닷가 길은 온간 기암괴석들의 전시장이다.

제주에서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 하는데, 이때는 각 마을에서 영등할망을 위한 영등굿을 한다. 외눈박이섬 또는 강남천자국에서 온다는 영등할망은 제주에 머무는 동안 해변의 보말을 까먹으며 다니는데 2월 보말 속이 비는 것이 그 증거라 한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배를 타고 나가지도 않고 빨래도 하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 기간엔 바람도 많고 날씨 변화도 심하다. 귀덕리항구 바닷가의 영등할망신화공원에서 영등할망 일행의 동상을 통해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곽지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부드럽고 넓은 곳이어서 여름이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여름이 아니라도 이곳엔 가 볼 이유가 충분하다. 이곳에서 한담리까지 걷기 편한 해변길이 제주의 어느 곳보다 힘차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길은 곽지해수욕장 끝에서 곽지과물해변산책로로 시작해 한담해변에서 장한철산책로라는 이름으로 끝난다. 제주가 생겨날 때 솟아나와 흘러내린 용암이 이곳에서 바닷물과 만나며 기기묘묘한 바위를 만들었고 그 바위에 거칠 것 없이 밀려온 파도가 세차게 부딪치며 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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