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히치콕도 몰라본 ‘오스카의 굴욕’

/ 기사승인 : 2009-02-23 13: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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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지구촌] 퀴즈 하나. 테리 길리암 감독의 ‘여인의 음모(원제 브라질·Brazil)’와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중 1985년 아카데미 작품상의 주인공은? 정답을 보면 아카데미상의 취향이 보인다.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여인의 음모’ 대신 오스카상은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한 장중한 러브스토리를 선택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은 할리우드 감독과 배우들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그러나 권위의 오스카상에도 ‘굴욕의 순간’은 있었다. 탈락시켜놓고 훗날 투표단이 뒷머리를 긁적였을 불운의 명작을 미국 CBS방송이 22일 ‘오스카가 무시한 영화들(The Movies Oscar Snubbed)’이라는 제목하에 유형별로 소개했다.

할리우드가 이미 유성영화로 옮겨간 뒤인 1931년 천재 감독이자 코미디 배우인 찰리 채플린이 고집스럽게 만든 무성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는 감동적 결말과 예술적 영상에도 불구하고 신기술을 내세운 할리우드 자본의 기세에 눌려 수상에 실패했다.

범죄 스릴러는 아카데미가 부담스러워 하는 장르 중 하나. 하워드 혹스 감독의 ‘스카페이스(Scarface)’ ‘빅슬립(The Big Sleep)’과
코엔 형제의 ‘밀러스 크로싱(Miller’s Crossing)’, 마이클 만의 ‘히트(Heat)’ 등 스릴러 명작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할리우드가 경시한 장르 중에는 서부극과 SF도 빼놓을 수 없다. 정통 서부극에서 한발 비켜난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를 제외하고 서부극 중 작품상을 받은 영화는 ‘시마론(Cimarron)’이 유일하다. 또 ‘ET’를 제외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SF영화는 한편도 없었다.

아카데미상 역사상 가장 운이 없었던 명감독은 단연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었다. ‘레베카’(Rebecca·1940년)로 작품상, ‘스펠바운드(Spellbound·1945년)로 음악상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전성기였던 50∼60년대 ‘이창(Rear Window)’ ‘현기증(Vertigo)’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사이코(Psycho)’ 등 영화사를 새로 쓴 명작들을 줄줄이 남기고도 한 차례도 후보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아카데미가 싫어한 감독들은 히치콕 말고도 또 있다. 20세기 최고 영화로 꼽히는 ‘시민 케인(Citizen Kane)’의 오손 웰스와 데이비드 린치, 짐 자무시, 테렌스 맬릭 등 할리우드의 이단아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카데미상과 우디 알렌과의 불편한 관계는 우디 알렌이 먼저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애니 홀(Annie Hall)’로 1977년 작품상을 거머쥔 우디 알렌은 시상식장에 참석하지 않았고, 2년 뒤 오스카는 ‘맨하탄(Manhattan)’을 무시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오스카의 입맛에 안맞는, 과격한 상상력으로 외면받았다가 평단과 대중들의 찬사를 끌어내 오스카를 머쓱하게 한 작품들도 있다. 10분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형사의 이야기 ‘메멘토(Memento)’와 하루를 무한히 반복해 사는 연인을 그린 빌 머레이·앤디 맥도웰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타인의 뇌속으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라는 기발한 발상의 ‘존 말코비치 되기’ 등이 아카데미상을 제외한 모두가 열광했던 작품들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