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권상우라는 로망

기사승인 2020-01-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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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트맨’ 언론배급시사회에서 만난 한 남성 기자는 학창시절, 남학생 중 열에 아홉은 배우 권상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다부진 근육질 몸매와 화려한 액션에 반해 남학생들 사이에선 ‘권상우처럼 운동하기’가 유행이었다나. 권상우는 또한 뭇 여성들의 이상형이기도 했다. 우수에 찬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때면 여성들의 마음도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권상우는 남녀 모두의 ‘로망’ 같은 존재였다.

권상우 자신도 여전히 ‘로망’을 안고 산다.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 같은 멋들어진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것,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는 멜로영화를 찍는 것, 시리즈물을 보유한 배우가 되는 것…. 하지만 기자의 귀를 기울이게 한 건 신인 감독들과 작업하는 자세였다. “데뷔를 위해 10여 년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세요. 제가 감독이라면 죽어도 못할 것 같거든요. 그런 분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저도 함께 성공한다면, 그 쾌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 꿈을 꾸면서 작업하는 것 같아요.”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상우가 들려준 얘기다.

‘히트맨’도 최원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최 감독은 단편 영화를 만들 때부터 줄곧 코미디만 해왔단다. 코미디 영화에서 위로를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권상우는 ‘히트맨’ 출연을 결정지은 뒤 최 감독에게서 손편지를 한 통 받았다. 최 감독이 딸에게서 ‘아빤 잘 될 거야. 내가 타임머신 타고 미래에 가서 봤어’라고 응원받았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권상우는 “울컥했다”고 돌아봤다. 최 감독이 딸에게서 들었다는 이 두 문장은 영화에서 준(권상우)의 딸 가영(이지원)의 대사로 되살아났다.

“‘히트맨’에는 코미디와 액션이 모두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가족애라고 봤어요. 준이와 아내 미나(황우슬혜)의 관계, 가영이와의 관계가 중요했죠. 황우슬혜는 정말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해요. 본인을 힘들게 만들면서까지 상황에 몰입하죠. 지원이는 ‘연기를 잘한다’ 수준을 넘어서 특별한 아이라고 느꼈어요. 특히 편집된 장면을 보면 ‘얘가 이런 것까지 계산했나’ 싶을 정도라니까요.”

권상우가 연기한 준은 국정원 암살요원 출신 웹툰 작가다. 악성 댓글에 눈물짓고 생활고에 한숨 짓지만 ‘히트맨’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마감에 시달리느라 공과금 납부일을 잊을 때도 있지만, 아내가 출근하면 집안일을 도맡고, 비가 내리는 날엔 우산을 들고 딸의 하굣길을 마중 나가는 ‘사랑꾼’에 ‘딸 바보’다. 영화에서 권상우는 장면마다 매력을 흩뿌린다. 허술한 듯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도 거는 순정, 그리고 ‘인간병기’라는 극 중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액션이 화학 작용을 일으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정작 권상우는 자신을 향한 칭찬을 쉽게 만끽하지 못한다. 데뷔 19년 차. 박수와 환호에 익숙할 법도 한데, 누군가 자신을 추켜세울라치면 여전히 쑥스럽단다. 그는 아직도 “도전하는 마음이 크다”고 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2001)의 관객 수가 500만 정도인데, 아직도 그게 제 최고 스코어에요. 물론 100만도 많은 숫자이지만, 그걸(최고 기록) 못 깬 게 좀 한심하기도 하고…. 빨리 깨서 ‘대한민국 만세!’ 외치고 싶어요.(웃음)”

[쿠키인터뷰] 권상우라는 로망10대 땐 생활고를 겪었고, 20대 땐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단숨에 톱스타가 됐다. 태권도, 농구, 권투 등 온갖 운동을 잘하는데, 미대에 진학했을 만큼 그림 실력도 좋다. 순정만화 주인공 같던 권상우의 삶은, 그가 가정을 꾸리며 제2막에 접어들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권상우는 딸 리호 양을 찍은 동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그가 편식하는 아들 룩희 군을 혼내자, 리호 양이 ‘오빠를 혼내면 어떻게 하냐’고 아빠에게 성을 내는 영상이었다. “어휴, 딸은 못 이겨.” 권상우가 엷은 미소를 띤 채 읊조렸다. 순정만화에서 가족영화로,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결혼 전엔 드라이브가 취미였는데, 이젠 빨리 못 달리겠어요.(웃음) 며칠 전엔 지인과 아들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혹시 운전하다 졸릴까 봐 전날 일찍 자고, 갈 때도 운전대를 바짝 당겨 차를 몰았죠. 아이들 자라는 걸 보면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껴요. 내가 언제까지 젊어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요. 배우라는 직업이 좋은 게, (작품이) 기록으로 남잖아요. 자식들이 나중에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사진첩처럼 생기는 거니까요. 그래서 좋은 작품, 꾸준히 많이 하고 싶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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