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마지막 이야기

기사승인 2020-05-04 02: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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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투오차 전망대에서 갔던 길을 되짚어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뒤쪽으로 돌아 나와, 성당을 오른편에 두고 돌면 네이치토른이 있는 성벽을 다시 만난다. 성벽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면 덴마크왕 정원(Taani Kuninga Aed)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원에서 축대 아래를 굽어보면 붉은 색 포도에 흰색 십자가가 그려있고, 그 머리맡에 덴마크 국기가 새겨진 기념물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Valdemar II)가 덴마크 십자군을 이끌고 톰페아 공격에 나섰을 때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반격이 거셌다. 이에 왕이 하늘에 기도했고, 하늘에서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본 덴마크군사들이 용기를 얻어 에스토니아 사람을 격파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테너보(Dannebrog)라고 하는 덴마크 왕국의 깃발의 시원에 관한 전설이다. 정원의 축대 아래에 있는 기념물 ‘tuli lipp(깃발의 하강)’은 이 전설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매년 6월 15일에는 덴마크 국기의 하강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정원 입구에는 3명의 얼굴 없는 수도사의 동상이 서있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eus) 그리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로 불리는 수도사는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발데마르 2세의 기도를 이끌었다고 한다. 동상은 토마스 안누스(Toomas Annus)라는 에스토니아 사업가가 은밀하게 후원해 제작됐다. 

정원 왼쪽 끝에 서 있는 수도사의 뒤쪽 벽에는 “breathe baby”라는 문구가 적혀있어 탈린을 찾는 여행객들의 인스타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인증샷 장소였다고 한다. 물론 코투오차 전망대의 ‘The Times we had’처럼 지금은 지워지고 없는 것 같다. 

이 문구의 의미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 수 없어 나름 추측해볼 수밖에 없었다. ‘breathe baby’는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은 아이를 숨 쉬게 하는 신생아 소생술에서 흔히 인용된다. 그러니까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운 장소라는 의미에서 ‘얘야, 숨은 쉬어야지!’ 정도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덴마크왕 에리크 6세(Erik Menved) 치세에 탈린 시민들이 이곳을 덴마크왕의 정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톰페아를 둘러싸는 탈린 성벽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리보니아 기사단과 탈린 시민 사이의 갈등이 빚어졌을 때, 왕이 시민들에게 톰페아 언덕에 머물 수 있는 ‘방해되거나 방해받지 않을(takistada või häirida)’ 자유를 보장해줬다는 것이다.

덴마크왕의 정원에 인접한 짧은 성벽에는 제겐 탑(Zegheni torn), 처녀의 탑(Neitsitorn) 그리고 높은 탑(Tallitorniks) 등 14세기에 지어진 3개의 방어탑이 있다. 처녀의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 성벽 아래에 있는 기념비는 에스토니아 민속 문화유산을 그림으로 표현한 쌍둥이 예술가 파울 라우드(Paul Raud)와 크리스티얀 라우드(Kristjan Raud)의 기념비다. 두 사람은 특히 에스토니아 건국에 관한 전설 칼레비포에그를 형상화했다.

덴마크왕의 정원을 나와 알렉산데르 네브스키 대성당 뒤쪽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긴 다리(pikk jalg) 길이다. 긴 다리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긴 다리 문 탑’(Pika jala väravatorn)을 만난다. 138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최고책임자 빌헬름 폰 프리에머스하임(Wilhelm von Friemersheim)의 지시로 건설됐다. 각각 6.2m, 6.8m 길이의 사다리꼴 평면에 세운 탑으로 높이는 약 11m였다. 1450년에 재건축되면서 석조부분의 높이만 20m에 달하게 됐다. 

긴 다리 문 탑을 빠져나오자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좁은 골목길이 이어진다. 모여서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단체로 온 관광객들인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 말고 자유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악사도 있다. 두리번거리며 가이드를 따라가다 보니 널찍한 광장에 이르렀다. 시청광장이다. 전날 저녁에 왔을 때는 파장해 썰렁하던 분위기가 오늘은 가판대가 늘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활기가 넘쳤다.

전날 본 시청약국 건물에 있는 중세 유물을 구경하고는 약국(Apteegi)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베네(Vene) 거리에 있는 카타리나(Katariina) 길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길드는 근처에 있는 카타리나 성녀 교회(Püha Katariina kirik)의 이름을 딴 장인들의 조합으로 1995년에 설립됐다. 

문화기념물로 지정된 건물에는 유리 공장, 모자 방, 가죽 작업장이 위치해있다. 탈린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수공예품 장인들 가운데 여성 예술가 14인과 이들이 활동하는 8개의 작업장이 중심이 돼 중세 길드의 전통에 따라 장인의 기술을 잇고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로비에 해당하는 공간의 벽에 장인들의 초상이 걸려있다. 이들이 작업장에서 만든 작품들도 전시하거나 판매하고 있었다.

카타리나 길드 건물을 나와 카타리나 성녀 교회에 이르는 짧은 길, 카타리나 통로(Katariina Käik)를 따라갔다. 베네(Vene) 거리와 무리바헤(Müürivahe) 거리를 연결하는 보행자 도로다. 카타리나 성녀 교회에 딸린 도미니카 수녀회 소속의 카타리나 성녀 수도원(Katariina klooster)은 1246년에 지어진 것으로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1542년 종교개혁 기간 중에 파괴됐다. 

당시의 유물 가운데 일부만 남아있는 건물에 보존돼 있으며, 대부분의 유물은 바로 옆에 있는 로마 가톨릭 성당인 성 베드로 성 바울(Peeter-Pauli katedraal)로 이관됐다. 카타리나 통로를 지나다보면 수도원의 입구를 비롯한 유물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카타리나 통로가 끝나는 곳에서 헬레만 탑(Hellemanni torn)이 있는 탈린 성벽을 만난다. 1410년에 건설된 3층 높이의 헬레만 탑은 훗날 무기저장고 혹은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미술갤러리로 사용된다. 사람들은 헬레만 탑을 중심으로 성벽산책을 즐기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적의 접근을 감시하기 위해 순찰을 돌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탈린성의 정문이라 할 비루문(Viru Väravad)이 있다.

비루문은 탈린의 구시가와 신시가의 경계에 서있다. 탈린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1345~1355년 사이에 14.5m 높이의 3층탑으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진흙 문(Savi väravaks)이라고 불렸다. 지금의 비루광장에 진흙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1460~1652년 사이에 비루문 앞 제방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1500~1504년 비루문의 주탑이 약 22m 높이의 5층탑으로 보완됐다. 탈린성벽의 큰 문은 사각형의 탑 형식으로 돼있으며, 하나 혹은 두 개의 규모가 작은 원형탑이 덧붙여졌다. 

지금은 2개의 원형탑만 남아있는데, 1870년 에스토니아 지방정부가 구시가 진입로를 확장할 계획을 세우면서 성탑 가운데 뚱뚱이 마르가렛과 키엑 인 데 콕만을 도시유적으로 간주하고 하주문, 긴다리문탑, 비루문을 철거하기로 했다. 

이에 비루문은 구시가와 카드리오르 궁전을 연결하는 마차 트램이 개설되던 1888년까지만 유지됐다. 비루문 인근의 성벽에 인접한 건물들은 1960~1962년 사이에 철거됐고, 100m 길이의 방어선이 복원됐다. 

비루문은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재건돼 탈린의 상징이 됐다. 비루문 밖 신시가 쪽에서 보면 왼쪽으로는 꽃가게가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식당들이 이어져 오가는 구경꾼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11시50분 에스토니아 국립오페라 극장 앞에서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탈린공항으로 향했다. 공식명칭 레나르트 메리(Lennart Meri) 탈린 공항인데 레나르트 메리는 에스토티아 독립운동 당시 지도자였으며 독립 에스토니라의 2번째 대통령을 지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탓에 20여분 만에 공항에 도착해 탑승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김영만 가이드와도 작별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발트연안국가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주려 노력한 김 가이드의 열정에 감사한다.

공항규모가 크지 않아서인지 30분 만에 보안검색을 마치고 탑승구로 갔다. 2시 20분 탑승을 시작할 때까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무대로 한 하일지 장편소설 ‘우주피스공화국’을 읽었다. 

바르샤바까지 2시간 20분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탈린과 바르샤바는 1시간의 시차가 있어 3시 8분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17분이나 단축됐다. 바르샤바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4시 30분 출발이라서 자칫하면 환승하기 위해 엄청 뛰어야 했을 터인데 다행이다. 역시 우리 일행 가운데 누군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출국신고를 마치고 탑승구에 도착한 것은 3시 35분, 55분부터 탑승을 시작하고 정시인 4시반 비행기가 탑승구를 물러났다. “Hüvasti Tallinn!, 잘 있어요. 탈린!” ‘반지의 제왕’ 작가 톨킨의 성장기를 그린 영화 ‘톨킨’을 감상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바르샤바에서 인천까지의 비행은 정말 특별한 일이 없었나보다. 금세 밤이 오고 기내가 어둠에 빠졌기 때문인 모양이다. 

폴란드항공이 자랑한다는 무제한 제공 컵라면도 먹은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기내식이 제공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비몽사몽 했던 모양이다. 바르샤바에서 인천까지는 9시간 40분이 소요된다는데 무슨 조화라도 있었는지 9시간만인 오전 8시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는데 한여름 더위는 지났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날 낮 최고기온은 31℃였다.

12시가 다 돼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더니 큼큼한 냄새가 반긴다. 먼저 창문을 열어 통풍을 하고 짐을 풀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것에 흥분되고 즐겁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행복함이 느껴진다. 

짐을 풀고 났는데 마침 주말에 보지 못한 드라마 ‘호텔 델루아’를 연속으로 재방송해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시청했다. 도착한 날이 일요일, 다음날은 원주로 출근을 해야 돼서 부담스러운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꽤나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 회로 2019년 여름에 다녀온 발트연안국가 여행에 대한 정리를 마치게 됐다. 30회 정도 예상했던 글이 길어진 이유는 지나쳐도 될 일까지 챙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 회부터는 2019년 봄에 다녀온 프랑스 여행을 정리해볼 생각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었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그들이 작품 활동을 했던 장소를 중심으로 돌아본 여행이었으니 미학여행기가 될 것 같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끝)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마지막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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