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슬릭 “설득하지 못하는 비난은 나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슬릭의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음악’

기사승인 2020-07-21 07: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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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인터뷰] 슬릭 “설득하지 못하는 비난은 나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죄송해요. 제가 아직 점심을 안 먹어서….” 최근 서울 월드컵북로 쿠키뉴스 사무실. 래퍼 슬릭이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슬릭은 가방에서 비건 쿠키를 꺼내 기자에게도 권했다. 달큼한 향에 마음이 녹은 걸까. 주절주절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거든요. 걔들 생각하면 육식에 죄책감이 들 때가 많은데, 막상 고기를 끊지는 못하겠어요.” 그러자 슬릭이 답하길, “그럴 땐 그냥 주변에 말해버리면 돼요. 나 이제 고기 안 먹을 거야, 라고. 헤헤.”

슬릭은 작년 초부터 비거니즘(Veganism·종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과 철학)을 실천 중이다. 육식이 동물 착취와 다르지 않다고 믿어서다. 그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 떴다.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폭력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슬릭은 4년 전 프리스타일 랩을 통해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의 인생을 출렁이게 한 선언이었다. 누군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반면 “단순한 쌍욕”이나 “아주 길게 쓴 비방글”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슬릭은 이 모든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 인터뷰하면서 ‘용기가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페미니스트 선언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사실 저는 이렇게까지 반발이 심할 줄 몰랐거든요. 물론 나쁜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긴 해요. 하지만 그 상처가 저를 변하게 하진 않아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후회도 하고 변하기도 할 텐데, 아직까진 저를 그렇게 설득하는 의견을 만나보지 못했어요.”

[쿠키인터뷰] 슬릭 “설득하지 못하는 비난은 나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이달 초 종영한 Mnet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이하 굿걸)은 슬릭의 정치적 메시지와 음악적 가능성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 방송 첫 무대에서 지난 5월 발표한 ‘히어 아이 고’(Here I Go)를 불렀다. 성 소수자를 호명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처음엔 ‘슬릭의 진지한 분위기에 어우러지기 어려울 것 같다’던 출연자들도 이내 편견을 무너뜨리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슬릭은 효연·제이미·윤훼이·에일리·퀸 와사비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인들과 협업하며 “그들의 경력에서 나오는 노하우”와 “열린 자세”를 배웠다.

이는 슬릭이 송캠프에서 보여준 적극적이고 유연한 태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슬릭은 “내가 얼마나 열린 사람인가를 확인할 기회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그는 많은 이들이 ‘스펙트럼의 양 끝에 있는 것 같다’고 했던 퀸 와사비와도 금세 친구가 됐다. 슬릭은 퀸 와사비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우리 둘은 ‘굿걸’ 그 누구보다도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과 퀸 와사비 모두 “자유롭고,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웃는 얼굴로 지켜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우린 세상 밖 사람들의 오해와 선입견을 인지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편견이 잘못됐다는 것과 그 편견이 나를 변하게 하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죠. 이런 위기나 역경의 와중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건 웃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의롭고 좋은 일이라도 그 일을 하는 내가 괴로워선 안 된다고, 내가 괜찮아야 한다고요.”

[쿠키인터뷰] 슬릭 “설득하지 못하는 비난은 나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사랑받고 싶어 특별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 뭐든 빨리 싫증 내는 성격이라 취미가 백 번 이상 바뀌는 동안에도, 음악만큼은 파도 파도 질리지 않아 음악가가 됐다. 랩을 시작한 건 중학생 때. 힙합 커뮤니티에 올린 믹스테이프가 래퍼 제리케이의 귀에 닿아 2013년 그가 이끄는 데이즈 얼라이브에 둥지를 틀게 됐다. 슬릭의 가사는 한 편의 산문시다. 그는 “비유가 있는 가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선우정아·아이유·김이나·타블로 등 그가 좋아하는 작사가만 봐도 취향이 드러난다. 슬릭은 “음악이 아닌 다른 표현으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이 노래로 나오는 거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무도 해치치 않는 음악”을 써내는 것이다. 슬릭은 “그러려면 내가 누구를 해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 힙합 신에서 제일 불만인 게 모르려는 자세에요. (소수자들이) 자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죠. 몰랐다는 말도 너무 당당하게 해요.” 슬릭도 성찰하며 전진해왔다. 그는 과거 발표한 노래 가사에 ‘병신’이라는 표현을 썼다며 2016년 SNS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말이 누구를 향하는지, 그 말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을지, 슬릭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상처받되 무너지지 않으면서 슬릭은 나아간다. 그를 할퀼 요량으로 음악을 공격해오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음악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는 이들도 있다. 부끄러움 모르는 힙합 세계가 슬릭을 아웃사이더로 내몰지라도, 그의 곁엔 김사월·신승은·남메아리 같은 친구들이 지키고 서 있다.

“불특정 다수가 나를 사랑하길 원하는 건, 로또에 당첨되길 바라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뤄지면 좋지만, 그럴 가망이 거의 없다는 뜻이죠.(웃음) 대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뭘 하나 싶은 허무함이 들 때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이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들을 생각해요. 엄마가, 친구들이,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일들을요. 거기에서 얻는 성취감이 저에겐 더욱 의미 있어요.”

wild37@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 기사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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