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생일 이야기

최문갑 / 기사승인 : 2020-08-03 10: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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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주부 / 작가)

▲ 이정화 작가

그해 이맘때, 나는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었다. 며칠 내내 시드니엔 비가 내렸고 차에서도 소리가 났다. 신음처럼 작았던 소리는 길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점점 커졌다. 비 오는 어둑한 거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달리는 우리 차를 보며 사람들은 브레이크 라이닝이 나갔다고 했다. 나는 혼자 차를 고치러 가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귀곡성을 내는 차를 바라보며 한국에 간 남편이 올 때까지, 자동차 바퀴가 발인 그 동네에서 운전을 하지 않고 버텨 볼 궁리를 했다. 


그러는 동안, 운전시험을 준비 중이던 아들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운전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이 무모한 기술을 발휘하기 전에 브레이크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서투른 영어로 묻고 물어 몇 십 킬로나 떨어진 정비소를 찾고, 잠잠해진 자동차를 몰고 오며 나는 흡족했다. 어설픈 이방인에겐 지도책을 보며 모르는 동네를 찾아간 것도, 고장 난 차를 수리한 것도 하나의 도약이었지만 무엇보다 브레이크를 제대로 한 것이 의미 있었다.  

이삼십 대의 내 삶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마치 어른이 된 듯싶었으나 사실은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였다. 가족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욕심들로 인해 실망과 후회를 거듭했고 종종 비명을 지르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멈춰야 할 때 주저 없이 멈추는 것과 그런 순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은 내게도 필요했다. 마침 그 날은 한여름 무더위에 태어나 엄마를 지지라도 고생시켰을 내가, 북극성대신 남십자성이 반짝이는 지구반대편 남반구에서 여름이 아닌 겨울비를 맞으며 맞은 첫 생일이었다. 별자리도 계절도 모두 바뀌고 뒤집혔지만 여전히 가정을 지키고 자신의 얼굴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사십, 진짜 어른이 되어 더이상 흔들려서도 안 될 불혹이 된 날이었다. 그런 날, 나는 차를 고치며 나의 행로를 재정비하듯 별 다르지 않은 하루, 그러나 내겐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했던 마흔 번째 생일을 보냈다.

며칠 전 나는 환갑이 되었다. 나이가 드는 것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육십 해나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단 하루도 예측할 수 있는 내일이 없다는 것은 좀 당황스럽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룬 것도 없이 하루하루를 등 떠밀린 듯 나이만 먹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깨닫고 배우며 성장할 것이다. 몸은 점점 늙고 있으나 정신까지 낡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젊을 때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좀 더 착해지고 순해지려 노력한다. 급히 화내지 않고, 오래 낙담하지 않고, 크게 바라지 않으며 적은 것에서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는데 육십 해를 썼다. 욕심과 분노와 실망과 헛꿈을 내려놓게 된 것도 나이가 준 선물이다. 젊음이 사라졌다고 모든 게 퇴락했던 것만은 아니다. 나는 사소하나마 조금씩 더 얻고 깨우치며 나이 들고 있다.  

영어로 ‘현재’와 ‘선물’은 둘 다 ‘Present’다. 사람들은 ‘현재’와 ‘선물’이 같은 것에 대해 우리가 돌아보는 어제, 그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올지 안 올지조차 모르는데 오늘은 이렇게 존재하니 그 자체가 감사해서 ‘선물’이라고 한다. 때때로 지치고 고단할 때면, 왜 나의 오늘은 선물처럼 기쁘지 않은가 싶어 억울해도 했지만, 사실 선물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소박하나마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내 가족과 주변에 선물 같은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그런 꿈을 꾸기에 딱 좋은 나이, 나는 또 한 번의 특별한 생일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