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성명문 받아쓰기

기사승인 2020-09-03 1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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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쿡기자] 성명문 받아쓰기
▲ 가수 아이유 / 사진=박태현 기자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신원 미상의 제보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에 관해 가수 아이유의 팬들이 성명서를 냈다’며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아이유 갤러리에 올라온 글을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기자들은 해당 내용을 받아 적어 기사로 보도했습니다. 해당 기사들 중 일부는 포털사이트 네이버 뉴스 정치섹션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기사로 꼽히는 등 파급력이 거셌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성명서가 어쩌다 나오게 됐는지 아시는 분?

사건 개요는 이렇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페이스북에 간호사의 노고를 칭찬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글을 올리며 가수 아이유를 언급했습니다. 아이유가 지난달 31일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 예종석)를 통해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에 1억 원 상당의 아이스조끼 약 4600벌을 기탁한 사실을 짚은 것이었죠. 그러자 디시인사이드 아이유 갤러리에선 ‘아이유 갤러리 공식 성명문’이 올라왔고, 이것이 제보자를 통해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해지며 기사가 쏟아져 나온 겁니다. 성명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이유의 따뜻한 마음이 현장에서 고생하시는 간호사 분들에게 큰 위로가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이유는 지난 2월 대한의사협회에 의료진들을 위한 1억 원 상당의 의료용 방호복 3000벌을 기증하기도 하는 등 (중략) 혹여나 아이유가 간호사 분들에게만 기부한 것으로 오해하는 국민들이 있을 듯해 이를 바로잡게 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언론사들은 성명문 내용을 받아적으면서도 해당 성명문이 아이유 팬들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성명문이 “아이유 갤러리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되려면, 우선 아이유 갤러리 이용자들 간 의견 취합 과정이 있어야 했고, 작성자 역시 대표성을 띤 인물이어야 합니다. 아이유 갤러리의 성명문은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명문 내용에는 아이유가 아이스 조끼를 기부한 날짜를 7월31일로 오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성명문이 진짜 아이유 팬이 팬덤을 대표해 쓴 것처럼 보이시나요.

디시인사이드의 연예인 관련 갤러리는 가입 절차를 따로 두는 공식 팬카페와 달리, 누구나 익명으로 자유롭게 글과 댓글을 작성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만큼 연예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쉽게 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라온 글들을 공적 영역인 기사로 옮겨오려면 더욱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지난해부터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발(發) 성명문이 유사한 문체와 폰트로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것이 실시간으로 제보돼 기사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명문들이 갤러리 이용자 일동을 대변할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절차에 의해 쓰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건 기자들의 무성의함뿐입니다. 어쩌면 마치 한 사람이 쓴 듯 엇비슷한 성명문들을 보고도 아이유 갤러리 성명문을 기사화하는 기자도 있을 수 있겠죠. 고통받는 건, 난데없이 진영 논리에 휘말린 아이유의 ‘찐’팬들일 겁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요. ‘기사 쓰기, 참 쉽죠~잉?’

wild3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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