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5)

기사승인 2020-10-17 0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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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선운산 입구의 송악은 아직 주변이 초록으로 변하기 전, 진달래 필 때쯤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제주에선 밭담의 돌을 움켜쥐고 자라고 숲의 나무를 끌어안고 자란다. 늦가을 꽃이 피고 겨울을 나며 씨앗이 여문다.
선운산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활짝 핀 모란꽃잎을 닮았다. 겹겹으로 쌓인 산봉우리 사이로 주진천이 동쪽에서 흘러들어와 휘휘 돌다가 북쪽의 곰소만으로 흘러나간다. 어느 산봉우리, 어느 골짜기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으뜸은 선운산도립공원의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의 골짜기들이다.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던 미당 서정주가 노래했던 ‘선운사 동백꽃’이 이곳에 있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도솔천 가 공터에 조성된 소공원엔 화산석을 이용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선운산은 언제 어디서 찾아오든 보람을 안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불교 신자들은 천년고찰 선운사가 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고, 많지는 않겠지만 서예에 관심이 있다면 일주문에서 일중 김충현을 만나고, 부도밭에서 추사 김정희를, 천왕문에서 원교 이광사를 만나는 기쁨이 더해진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주차장을 벗어나기 전 공터에 꾸며진 소공원엔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남길만한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욕심부려 찍으려 한다면 여기서 한나절 즐겨야 한다.
3월 하순이면 선운사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의 울창한 동백숲에 붉게 핀 동백꽃이 수줍게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4월 하순이면 화들짝 피어난 겹벚꽃이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벚꽃이 지면 새로 핀 나뭇잎이 아직 검푸른 소나무와 동백 숲 너머로 꽃보다 더 아름답다. 여름 볕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선운사 마당과 대웅전 양쪽의 배롱나무가 붉게 타오른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선운초서문화관은 고창 출신 서예가 취운 진학종의 초서작품들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이 주변엔 고창의 죽염 전시 판매장을 비롯해 기타 공예품 전시장도 있어 살펴볼 만하다.
9월 하순이 시작되면 눈 가는 곳 어디든 검붉은 꽃무릇이 꽃대를 올리고 타오르기 시작한다. 깊어진 가을에 선운산의 화려한 단풍은 나무에서 불타고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의 물속에서도 불탄다. 

봄부터 가을까지 붉게 물들었던 선운산은 겨울이 되면 추위 속에서도 동백과 소나무는 그 초록이 더욱 짙어진다. 눈이라도 내리면 그 초록으로 온 산봉우리들이 더욱 희게 빛난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이 산책로는 은행나무와 겹벚꽃나무가 잘 어울려 있다. 3월말 핀 동백꽃이 지고 나면 4월 하순에 접어들며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러니 선운산에 한 번만 와 볼 수는 없다. 동백꽃 필 때 오고 배롱나무꽃 필 때 오고 꽃무릇 타오를 때 오고 도솔천에 단풍 빛 곱게 비칠 때 와야 하고 한겨울 눈 쌓일 때는 푸른 옷 입은 산봉우리들 그리워 온다.

어떤 이유로든 선운산에 오면 주차장에 발을 딛는 순간 늘 두 가지 이유로 감탄한다. 주차장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은 그 하나하나가 평범하지 않다. 
그렇다고 시작부터 마음이 앞서 서두르면 선운산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되고 돌아가서 후회하며 다시 갈 궁리를 하게 마련이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선운산 생태숲은 인공으로 꾸미기는 했지만, 숲과 습지를 걸으며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9월 하순엔 숲 가득히 꽃무릇이 붉다.
선운산의 매력은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산봉우리가 에워싼 하늘을 한 번 보고 앞을 보면 소금전시관, 취운 진학종 초서 전시관 그리고 기념사진 찍기에 적당한 크고 작은 장치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붙든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생태 숲과 연못을 걷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하늘과 산과 나무만 바라보아도 흡족한 곳이다.
주차장 왼쪽으로 선운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울이 도솔천이다. 그 냇가 바위벽을 사철 푸르게 감싸고 자라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그 씩씩한 생명력이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천연기념물 제367호 ‘고창 삼인리 송악’인데 현재 내륙에서는 고창이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송악은 나무,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 숲 등 어디에서든 지천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고창에서는 흔하지 않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습지 관찰로는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름이 둥둥 떠 있고 곳곳에 노랑어리연이 자라고 있다.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 역시 조심스럽게 그 세력을 키우고 있다.
선운사 일주문에 이르기 전까지 생태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습지 형태의 연못과 숲에 다양한 나무와 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연못엔 멸종위기 종인 가시연꽃이 조심스럽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고 발자국 소리에 물고기들이 모여들어 펄떡인다. 숲엔 특이하게도 오래된 감나무가 많이 보인다. 아마도 이 일대가 주차장과 기타 부대시설로 바뀌기 전까지 있었던 마을의 감나무를 옮겨 심은 듯하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선운사 동구는 꽃이 예쁜 곳이다. 미당이 찾아들던 시절의 실파밭과 주막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3월 말이면 동백이 피고 한 달 뒤엔 벚꽃이 길을 덮는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나뭇잎이 소나무와 동백나무의 검푸른 숲 주위를 감싸고 나면 온갖 들꽃이 지천이다. 8월의 배롱나무꽃과 9월 하순의 꽃무릇을 보고 나면 선운산의 꽃 여행이 끝난 듯하지만, 아직 아니다. 꽃무릇만큼이나 붉은 선운산 단풍이 기다린다. 
풀과 나무에 조금 관심이 있다면 생태숲을 살피기에도 한나절은 필요하다. 특히 9월 하순 꽃무릇이 마른 짚에 불 번지듯 타오를 때면 나무와 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그 붉음에 정신을 빼앗겨 한 걸음 나아가기 어렵다. 그러니 굳이 서둘러 일주문 안의 선운사 골짜기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천천히 걷다가 숲 가장자리에서 미당 서정주 시비를 만나면 거기에 적힌 ‘선운사 동구’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읽어도 좋다. 이렇게 차분히 시 한 수 읽은 적이 언제였던가.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 동구 걷기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