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기자의 트루라이프] 청인(淸仁)약방 열고 청인(淸人)으로 살아온 신종철 약업사

곽경근 / 기사승인 : 2020-10-24 04: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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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한자리서 약방 지켜온 괴산 청인(淸仁)약방


- 1958년 고향마을서 약방 열고 마을 주치의로 한평생
- 오롯이 한자리 지키며 마을주민과 희로애락
- 예전 칠성면 행정은 청인약방에서 모두 이뤄질 정도
- 본업 외에도 대서, 작명, 부고, 주례까지 대소사 도맡아
- 어려운 이웃 숨구멍 틔워준 사회사업가
- 빚보증 갚느라 집안 살림은 빈곤의 연속
- 세상살이는 ‘인과응보’, 착하게 살면 반드시 복 받아
- 지난 6월 괴산군에 약방 기부, 바람은 약방박물관


[쿠키뉴스] 괴산·곽경근 대기자 =  “제가 한겨울 학교 뒤 빨래터에서 언 손 녹여가면서 빨래하고 집에 오면 목이 아파서 침도 못 삼키고 밥도 못 먹었어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 찾아가면 목에 약을 발라주고 주신 약을 먹고 나면 금방 병이 나서 밥을 잘 먹었어요”
“그때 그렇게 도움을 많이 받고 지냈는데 고향 떠나고 사는 게 바빠서 50년 만에 선생님을 찾아봬요.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그래도 건강한 모습 보니 감격스럽네요”

지난 17일 충청북도 한 산골 면 소재지 오래된 약방의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황영란(81) 씨는 신종철(88) 약업사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반갑고 죄송하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충청북도 괴산군의 관광명소인 ‘산막이옛길’ 초입의 칠성면 도정리의 아담한 공원에는 청동기 시대 유적인 7개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시옷자 모양의 파란 함석지붕 아래 청인약방 풍경은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200년 넘은 마을 수호목 느티나무와 7기의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있다. 빛바랜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며 출향인들에게는 추억과 향수에 젖게 만든다.

도정리는 일제시대 붙여진 이름이고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곳은 ‘칠성바위 솔밭 거리’라 불렀다. 일곱 개의 바위와 함께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바위만 남고 소나무는 다 없어졌다.
바로 이 고인돌 사이에 족히 200살은 넘어 보이는 마을 수호목 느티나무가 서 있고 나무 아래 파란 양철지붕을 얹은 목조건물에 ‘청인약방’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약방의 유리문에는 붉은색으로 ‘약’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영화 세트장 같은 오래된 약방 안에는 지난 1958년 청인약점(淸仁藥店)으로 개점해 약방의 역사와 함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수(米壽)의 노 약업사가 오늘도 과객을 맞고 있다.

신 어르신은 지역의 대소사도 책임졌다. 글을 잘 모르는 주민들이 신 씨에게 찾아와 부고장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면 최소 100장 이상을 써야 했지만 기꺼이 주민들의 손이 돼 주었고 주례도 도맏아 했다.

산골 마을에서는 의사는 물론 약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무의무약(無醫無藥) 시절, 약업사 신종철 선생이 운영했던 청인약방은 면의 유일의 의료기관이었고 그는 마을의 주치의였다.

어느샌가 보건소가 들어서고 병원과 약국이 생기면서 처방전 없는 일반 약품만 판매할 수 밖에 없는 약방들은 쇠락을 길을 걸었다. 하지만 평생을 칠성면의 건강지킴이, 고향 지킴이, 이웃 돌봄이로 살아온 5척 단신의 신 약업사는 아직도 면의 가장 큰 어른이자 정신적 주치의이다.
신 어르신은 지난 6월 25일 신씨는 약방 건물(33.72㎡)과 부지(73㎡)를 군에 기증했다. 군은 향후 이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마을 역사 등을 설명하는 해설사도 배치할 계획이다. 괴산 대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 진입로와 약방이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는 만큼 두 곳을 연계한 관광상품도 계획 중이다.

가을하늘이 눈부신 지난 17일, 반백 년 넘게 고향의 시간을 지켜온 청인약방을 찾았다.
약방 유리문을 살며시 열자 오래된 나무 마루 넘어 방안에서 볼륨을 높인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루 위 약장에는 박물관에서나 본 듯한 빛바랜 크고 작은 약상자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인기척에 방문을 열며 단정한 모습의 어르신이 반갑게 기자 일행을 맞는다.
멀리서 아침 일찍 오느라 애썼다며 건강음료를 따서 건넨다.

조그마한 방안에는 어르신과 함께한 손때 묻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분히 둘러보니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써왔다는 일기장 일부와 빛바랜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충북지역 대의원 사진이 박혀있는 액자,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 지인이 선물로 주었다는 50년 넘은 그림, 손때 묻은 선풍기 등 근현대사의 잊혀져 가는 추억들이 방안 구석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 어르신은 손때 묻은 라디오를 어루만지며 "이제는 눈도 맑지 않아서 라디오만 틀어놓고 살아. 아직도 소리는 잘 들리는데 오래되서 배터리를 많이 먹는게 흠이야"라고 말했다.

 “내가 이제 살 만큼 살아서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워, 그래서 TV도 잘 안 보고  60년 된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내 유일한 친구야”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면서 기자가 앉은 방향으로 전기난로를 돌리며 몸을 녹이라고 배려한다.

“내가 이제 얼마나 살겠어, 내가 죽으면 약방의 역사도 끝나, 나만큼 약방을 잘 보존한 사람도 아마 없을 거야”라며 “어려웠던 지난 시절 약방들이 그래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많은 사람을 살렸어. 그런데 누구도 약방에 관심이 없어, 그래서 약방박물관 하나 만드는 게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황반변성으로 눈은 흐리고 귀는 어두워도 어르신의 얼굴과 생각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신종철 선생은 잠시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흑백 필름을 돌리는 추억의 영사기처럼 지난 세월 이야기보따리를 차분히 풀었냈다.

 -신종철 선생의 이야기를 구술로 정리했다-


“내가 우리면 칠성초등학교 15회, 우리 아들이 42회 졸업이야. 해방되고 다음 해 중학교 시험을 봤는데 군 전체에서 2등으로 합격했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가 이웃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친척에게 등록금이 5000원을 빌려왔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어렵게 빌린 돈으로 장례를 치르고 나니 중학교는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본동치과 근무시절(사진 가운데)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었어. 서울 용산에 고향 어른이 치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무작정 올라갔어. 병원에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지. 기공사, 간호보조원, 청소까지 하면서 야간 중학교에 다녔어. 차가운 병원 바닥에 담요 한 장 깔고 열심히 공부했지. 말 그대로 주경야독지. 그 당시는 고등학교가 없고 중학교가 6년 시절이었는데 숭문중학교 4학년 때, 6. 25전쟁이 나는 바람에 사흘을 걸어서 고향에 내려왔어”


“고향에 와서도 특별히 하던 일이 없던 참에 서울에서 치과 하던 고향 분이 청주에 내려와서 치과병원을 열었어. 거기서 또 한 2년 열심히 일했지. 그때 모은 돈으로 의대를 가려고 했는데 의사 부인이 들었던 계가 깨지면서 거기에 들어갔던 내 월급까지 모두 날아가 버렸어. 학교하고 나하고는 영 인연이 없었나 봐”

“내가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니까 인천의 한 치과병원에서 오라고 해서 근무하던 중에 부모를 모시던 동생이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55년도인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지”
개업 당시의 청인약점 모습/
당시 청인약방(약점)은 마을에 하나뿐인 의료시설이었기에 때문에 조금이라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신종철 선생을 찾았다. 마을 주민들은 가족 중 누구라도 아파 누워 있으면 무작정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때 청주 치과에서 일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양약종상(양약 도매상)의 권유로 약방을 열었어. 그때가 1958년 3월이야. 약방을 얻을 돈도 없었는데 마을주민의 도움으로 양반집 별당채를 구해 약방을 시작했어. 이름은 ‘청인(淸仁)약점’으로 지었지. 나에게 도움을 준 청주 약종상과 인천병원 원장 부부를 기억하기 위해 한 글자씩 따 이름을 지었지. 청인약점에서 시대에 따라 청인 약포로 바꿨다가 지금의 청인약방이 된 거야”
약방은 청인약점, 청인약포, 청인약방으로 상호를 바꿔 주민 건강을 책임져왔고, 사랑방 역할도 했다.

“약방 개업 당시에는 산아제한도 없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라 우리 면 인구도 만 명이나 됐어. 하지만 면에 의료시설이라고는 한약방하나, 양약방 3개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나밖에 없어서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내 약방만 찾았어. 얼마 안 지나서 나머지 약방들은 문을 닫았어”

이규서(58) 칠성면장은 “저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신종철 어르신을 잘 안다. 신 선생님은 한마디로 사회사업가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늘 발 벗고 나섰다”면서 “예전에 우리 면에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80%는 신 선생님이 주례를 섰을 정도로 마을을 위해 정말 애 많이 쓰셨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어른들은 급성폐렴, 아이들은 홍역, 장티푸스 등으로 많이 죽었는데 페니실린이나 마이신이 나오면서 이 약들 먹고 살아났지. 지금으로 봐서는 불법의료행위지만 당시 면에서 임상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었어, 부러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급하게 째고 꿰매고 하는 일은 내가 많이 했어. 죽을 사람 많이 살렸어.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큰 보람이야”

“칠성면에서는 내가 안가본데가 없지. 자전거 한 대 사가지고 칠성면 구석 구석 아픈 사람 있는데는 다 찾아다녔어. 산골 오지마을은 약을 가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다녔지. 그래도 힘들게 찾아가서 아픈 사람 약주고 병 고쳐 주고 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어. 감사하다며 반찬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정성껏 차려준 식사, 맛있게 먹었던 것도 기억이 나고”
50년대 치과 기공사 및 보조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우리 면은 예전부터 술집이나 다방이 없었어. 그래서 느티나무 그늘도 시원하고 마을사람이 부탁한 약도 사러 올 겸 우리 약방은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어. 약속도 약방으로 정하고, 동네 사랑방이었지. 아이나 어른이나 약방마루에 앉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어. 사람이 하도 많이 앉아서 마루바닥이 맨질맨질했다구”

“그래서 지금도 다른 건 다 없어져도 우리 약방은 끝까지 남아있어야 한다는 거지. 나도 죽기전까지는 약방에서 사람들을 맞이할꺼야”
신종철 선생과 한 마을에서 평생을 지내온 팽용만(86·사진 우측)씨는 “신 의원은 내 국민학교 선배인데 딴짓 안 하고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형님이야, 맨 날 신세 진 기억 밖에 안나, 마을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지”라며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마을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나의 가장 단점은 마음이 여린 거지.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하겠어. 마을에서 신망도 두텁고 지도력도 있으니 면 발전을 위해서 정당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러번 부탁하더라구. 자의 반 타의 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세 번이나 했고 칠성면 재건 국민운동촉진회 회장도 맡았었지”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돈 얻어달라고 부탁하면 여기저기 다니며 돈 얻어주고 빚보증 서주고, 주례 서고 마을 대소사는 다 맡아서 했지. 이웃 사람들이 어려운 부탁을 하면 면전에서 거절을 못 하겠더라고. 뻔히 저 사람한테는 돈을 못 돌려받을 것 같아도 형편껏 빌려줬어”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부고장을 써달라고 부탁하면 밤새워 100장 이상씩 써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이름도 지어주고, 생각해보니 주례도 천 오백 번 이상 선거 같아.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건 다 그렇게 했지만 개인 사채는 정말 무섭더라고… 6억 정도 빚보증 선 돈이 이자가 불어서 금방 10억이 넘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청주 가서 은행에 우리 집 담보로 잡히고 우선 급한 불 끄고 거의 50년 가까이 보증 빚 갚느라 힘들었어"
약국과 약방의 차이/
약국은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조제를 하는 곳으로 약사나 한의사 면허를 소지한 사람이 전문의약품을 조제 판매하는 곳이다. 약방은 약업사 자격증 소지자가 운영하는 곳으로 전문의약품이 아닌 일반 약품을 판매하는 곳이다.1953년 약국이 흔치 않던 시절, 의료 소외 지역을 중심으로 약업사 면허를 발급하여 약방 개설을 허가해 주었는데 나라에서 지정한 지역에서만 개설이 가능했다.

"그러니 집안형편은 어려울 수 밖에… 우리 집사람이 워낙 말도 없고 착해서 그렇지 아마 다른 집 여자 같으면 벌써 못산다고 집 나갔을 거야. 덕분에 아이들도 학교 다니고 한창 클 때 제대로 뒷바라지 못했어. 지금도 그건 참 미안해”

“솔직히 나도 마을 사람들 덕분에 자식들 공부시키고 부모님 봉양하고 먹고 산 거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게 사람 사는 도리라 그렇게 한 것뿐이지 내가 뭐 특별한 사람은 아니야!”
부인 심정옥 여사와 약방 앞에서 기념촬영/ 
큰아들 신동한(59) 씨는 “언제나 바깥 일로 분주하셨지만, 자식들한테는 끔찍하셨다.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라며 “아버님 못지않게 고운 성품의 어머니 역시 훌륭한 분이다. 두 분 모두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밝혔다.

 “아내는 음성의 면장 집 여섯째 딸인데 21살에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고생만 했지. 그래도 아이들 잘 키우며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해 본 적이 없는 참 고마운 사람이야”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게 다 ‘인과응보’ 더라고. 착하게 살았더니 그 복이 자손들에게 다 온 것 같아, 난 아이들이 셋인데 아들 둘은 서울대학교 나오고, 딸은 이화여대를 나왔어. 괴산군에서는 아마 처음일 거야, 손주들도 다 국내외 명문대학 나와서 자리 잡고 잘 살아, 이 이상 큰 복이 어디 있어”
눈이 나빠진 후로는 돋보기를 보며 그날의 중요했던 내용만 간략히 기록한다.

 “또 내 자랑은 아니지만 6·25전쟁 발발 시부터 쓰기 시작해 그동안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장이 70권이 넘어. 지금은 눈이 나빠서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쓰고 말아, 몇 달 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너무 귀한 자료라며 복사한다기에 모두 빌려줬어”
신 선생이 보존하고 있는 옛 약품들/ 
이차영 괴산군수는 “신종철 어르신께서 평생 일궈온 약방을 괴산군에 기부하는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셨다. 어르신의 큰 뜻에 따라 괴산군의 자랑인 청인약방을 문화유산으로써 보존해 후세에 물려줄 계획”이라며 “청인약방 인근에는 괴산군 대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 한국관광공사가 언택트 관광지 100선으로 꼽은 갈은구곡 등 아름다운 관광지들이 있다. 이들 관광자원과 연계한 상품을 개발해 청인약방이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아마 아직 잘 찾아보면 전국에 더러 약방이 있겠지만 여기처럼 옛 약방 모습과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곳은 없을 거야. 우리 약방이 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이참에 근현대 역사 문화 보존 등을 위한 약방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 커. 그래서 몇 달 전 군에 약방을 기증도 한 거고”

3시간 가까이 한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던 어르신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동네 맛있는 묵밥 집이 있다며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기자 양반들이랑 차 가지고 갈 테니 집 앞에 서 있으란다.
“얼른 밥 먹고 어둡기 전에 서울 올라가야지”
평생 베풂이 몸에 밴 어르신은 식당에 도착해 주차하는 사이 어느새 밥값도 계산을 끝냈다.
신 어르신은 지난 6월 25일 신씨는 약방 건물(33.72㎡)과 부지(73㎡)를 군에 기증했다. 군은 향후 이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마을 역사 등을 설명하는 해설사도 배치할 계획이다. 괴산 대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 진입로와 약방이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는 만큼 두 곳을 연계한 관광상품도 만들 계획이다.

-삶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홀연히 떠나는 것-
신종철 선생은 이제 빚도 모두 갚았고 약방도 나라에 맡겼다.
그래도 조상이 물려준 조그만 땅덩어리와 사는 집 한 채는 지켰다.
이미 70세에는 자신의 몸까지 충북대 의대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청인약방 내부 지금은 조제약이 아닌 비타민 음료와 일반의약품 일부를 판매하고 있다. 약방 선반에는 신 어르신이 마을에서 활동했을 당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평생을 나누고 베풀며 이웃과 그렇게 오순도순 살았다. 자식들에게 넉넉한 삶은 제공하지 못했지만 올곧게 키우며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았다. 키는 작지만 모두가 그를 우러러본다. 마을의 큰 어른이다. 아프고 어려운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약으로든 물질로든 그들의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돈 몇 푼에 인품을 팔지도 않았다. 그저 세월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거스름 없이 순응하며 살았다. 그만하면 잘 산 삶이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동영상=왕고섶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