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낙태죄’ 존폐 토론, 존치팀의 필살기는?

기사승인 2020-10-29 0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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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낙태죄’ 존폐 토론, 존치팀의 필살기는?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대학교 1학년 필수교양 수업에서 낙태죄 존폐를 쟁점으로 토론을 했다. 수강생 14명이 존치를 주장하는 팀과 폐지를 주장하는 팀에 무작위로 배정됐다. 나를 포함해 대다수 친구들이 마음속으로 ‘제발 폐지팀 되게 해 주세요’를 수백번 되뇠다. 누가 봐도 존치팀보다 폐지팀이 제시할 근거가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존치팀에 배정된 것을 확인하고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했다. 폐지팀 친구들은 이미 이겼다며 만세를 불렀다.

토론은 예상대로 폐지팀의 승리였다. 폐지팀은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 신체적 자유, 낙태죄의 무용성 등 중·고등학교에서 흔히 접했던 임신 중단 허용 논거들을 나열했다. 존치팀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생명윤리는 “임신한 여성의 생명도 태아의 생명만큼 중요합니다”라는 반박으로 쉽게 무력화 됐다. 토론이 끝나고 교수님은 유독 존치팀을 격려해 주셨다. 쉽지 않은 논증에 최선을 다해준 존치팀의 수고를 치하해주신 것이다.
 
내뱉지 못한 일침은 꼭 말다툼이 끝나고 돌아서면 생각난다. 그러나 낙태죄 존폐 토론은 예외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할 때까지도 당시 존치팀에서 활용할 수 있었을 필살기 일침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반면 폐지팀에서 제시했던 논거들은 갈수록 강화됐다.

형법상 낙태죄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임부와 수술을 한 의사를 범죄자로 규정한다. 일부 예외 조항을 만족한 임부만 임신중절 수술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이 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다면 지금 우리나라에는 불법 임신중절 수술이 없고, 법을 어긴 임부와 의사들은 모두 범죄자가 되어 벌금을 내거나 감방에 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 임신중절 수술의 90%는 불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17년 기준 국내 임신중절 수술 추정 건수는 49,764건, 이 중 합법적인 수술은 4113건에 불과했다. 불법이 난무하지만 법의 철퇴는 없다. 지난해부터 낙태죄 사건은 모두 불기소 처리 됐다. 지난 10년동안 낙태죄 관련 판결 125건 가운데 징역형이 선고된 사례는 7건, 벌금형은 14건이다. 나머지 74.4%는 선고유예·집행유예로 마무리됐다.

낙태죄는 범죄를 막지 못하고 범죄자를 처벌하지도 않는다. 낙태죄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조항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나왔다. 토론 수업이 끝나고 약 5년 동안 폐지팀의 논거는 더욱 견고해져 반박의 여지를 찾기 어려워졌다.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여성시민단체와 인권운동가들의 반발이 크다. 이런 결정을 한 국회의원들이 5년 전 토론 수업에서 존치팀에 배정됐다면 토론의 승패는 달라졌을까. 존치팀을 승리로 이끌고 교수님에게 더 많은 칭찬을 받을 필살기를 제시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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