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완성 ‘삼토반’] 고아성·이솜·박혜수의 여섯 여자들

이은호 / 기사승인 : 2020-10-31 08: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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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 이하 삼토반)을 본 관객이라면, 세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고아성·이솜·박혜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연기한 여섯 명의 여성들을 쿠키뉴스가 돌아봤다.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 ‘윤나영(왼쪽), 이자영
■ ‘라이프 온 마스’ 윤나영 VS ‘삼토반’ 이자영

삼진그룹의 이자영과 인성서부경찰서 윤나영 순경은 성차별의 설움을 공유한다. 고졸 여사원인 이자영이 후배 남직원에게 ‘이자영씨’로 불려야 했다면, 윤나영 순경의 호칭은 ‘미쓰 윤’ 내지는 ‘윤 양’이었다. 이자영은 “자영씨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유능하지만, 주 업무는 커피 타기, 담배 심부름, 전화 당겨 받기 등에 그쳤다. 사정은 윤나영도 비슷하다. 그는 국내에 프로파일링 기법이 정식으로 도입되기 훨씬 전부터 여러 사건의 유형을 분석하고 범죄자의 심리를 파악했다. 하지만 한태주(정경호)를 만나기 전까지,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고작해야 수사 자료 정리, 커피 배달, 전화 응대 정도였다.

여성이 직업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그럼에도 둘은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한다. 이자영은 내부고발의 위험을 알면서도 폐수 유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애쓴다. 거듭된 실패와 면벽 배치의 수모를 겪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윤나영 순경은 범인을 잡기 위해 글자 그대로 온몸을 내던진다.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에 미끼가 돼 잠입하고, 범인에게 구타를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제 두 손으로 범인을 잡아낸다. 구조적인 성차별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자영과 윤나영의 사례는 성별 차별적인 조직이 얼마나 큰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미소(왼쪽), 정유나
■ ‘소공녀’ 미소 VS ‘삼토반’ 정유나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사랑한다. 가사 노동으로 하루에 4만5000원을 벌면 위스키를 마시는 데 1만2000원, 담배를 사는 데 2500원을 쓰는 식이다. 새해가 되고, 모든 것이 비싸진다. 담뱃값은 4000원이 됐고 월세도 5만원이나 올려달란다. 이대로는 적자다.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 대학 친구들의 집을 전전한다. 친구들은 신세를 지면서도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 않는 미소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끝내 위스키 가격마저 오르고, 미소는 한강 변에 텐트를 치고 산다. 먹던 약을 끊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된 채로도 가사 노동을 하며 돈을 번다. 담배와 위스키는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는다.

미소는 살을 에는 생계의 위협에도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선택을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삼진그룹의 정유나는 다른 누구(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는 직장 상사의 성적 희롱 내지는 추행을 참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흔한 시대였대도, 정유나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동시에 그 역시 자신을 위해 다른 이를 끌어 내리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훔쳐가는 상사를 미워할지언정 그에게 속임수를 쓰지 않고, 말로는 사기를 꺾더라도 윤리적인 행동을 한다. 미소와 정유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지켜내는 과정은 매 순간 투쟁의 연속이다. 생계를 위해 자존과 품위를 버려야 하는 시대, 두 사람의 존재가 위로와 용기로 다가오는 이유다.

▲ 양판래(왼쪽), 심보람
■ ‘스윙키즈’ 양판래 VS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심보람

양판래는 “전쟁 통의 여자”다. 흑인으로 사는 것과 여자로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드냐를 두고 양판래와 입씨름을 하던 잭슨(자레드 그라임스)은 “전쟁 통의 여자”라는 양판래의 말에 백기를 든다. 그는 살기 위해 “양공주”가 됐다. 미군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주는 돈과 먹을거리로 생계를 꾸린다. “양공주” 무리에 끼지 못한 삶은 더욱 비참하다. 강병삼(오정세)의 아내 매화(주해은)는 1달러에 자신을 포기한다. 그나마도 린다(박진주)에게 들켜 매타작을 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위협받기까지 한다. 양판래는 “퍽킹 이데올로기”를 외치며 춤을 춘다. 춤 안에서 그는 마침내 자유롭다.

송보람은 싫어하는 것이 많다. 그는 고졸 입사자들에게만 유니폼을 입히는 것을 싫어하고, 곧 서른 살인데도 여자애 취급당하는 것을 싫어하며, 남자 직원들의 룸살롱 비용을 가짜 영수증으로 메우는 것을 싫어한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 안에서 고졸 출신 여자 직원인 송보람의 자존감은 쉽게, 그리고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격렬한 춤 동작으로 해방을 갈망하던 양판래와 달리, 송보람의 각성은 긴 시간에 걸쳐 고요하게 벌어진다. 그는 결코, 거짓 장부를 쓰던 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요만큼이다’ 정해놓은 세상”에 체념하지 않을 것이다. 자동 회계 시스템을 쓰며 행복해하던 그의 표정이 말해줬다.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