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프레스] 그들에 대한 연대는 왜 ‘정치적’이 됐나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기사승인 2020-11-30 14: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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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프레스] 그들에 대한 연대는 왜 ‘정치적’이 됐나
[쿠키뉴스 유니프레스] 윤수민 연세춘추 기자 = 입시준비를 위해 한창 자기소개서를 쓰던 때의 일이다. 내 자소서 중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는 친언니의 말에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수험생 카페에 글을 써봤다.

‘자소서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나서 얘기 나눴던 경험을 언급해도 괜찮을까요?’

내가 자소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진 공감, 연대감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권에서 세월호 관련 논쟁이 활발했기 때문에 언니는 이마저도 정치적으로 읽힐까 걱정했던 것이다.

‘Re : 세월호 유가족들이요? 잘못하면 정치적인 글이 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탈락의 가능성을 사시나요.’

예상보다 꽤 많은 댓글이 달렸고, 십중팔구는 나를 만류하는 댓글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과도한 걱정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교육 시스템과는 달리 세월호 문제는 정치적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정쟁화돼 왔고, 그때마다 유가족들을 두고 모욕이며 혐오며 치열한 논쟁이 오갔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제 노란리본은 더 이상 추모의 의미가 아니라 특정 정치성향의 상징이 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교육부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교내에서 노란리본을 금지했던 때가 있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헬멧에 노란리본을 붙이고 출전했던 김아랑 선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소되기도 했다. 노란리본이 ‘정치적 표현’ 아니냐는 시비였다. 결국 김 선수는 3일 뒤 경기에서 노란리본을 가려야 했다.

한국에 방문해 노란리본을 달고 미사 드렸던 프란치스코 교황마저도 정치적 중립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과 “중립을 지켜야 하니 노란리본을 떼는 것이 좋겠다”는 식의 조언을 들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가족들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는 그 순수성을 의심받기 쉬웠다. 유가족들을 만나 함께 눈물 흘리고 그들 앞에서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내 자소서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지워졌다. 자의적인 선택이었지만, 나에게 많은 질문이 남았다. 피해자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시선을 보내는 일은 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 됐을까. 내가 어느 상황에서도 굳게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했던 그들을 향한 연대는 실질적으로 얄팍하고 선택적이며 기만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지난 9월, MBC 취재기자 공채 필기시험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문제제기자를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호소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 문제가 2차 가해이고 사상검증이라는 논란이 일었고, 나는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왜 사상검증 수단이 됐을까. 내가 만약 응시자였다면,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출제자의 ‘입맛’에 맞게 답안을 작성하며 상황에 따른 선택적 연대를 하지는 않았을까. 

왠지 모르게 거부감을 주는 ‘정치적 성향’, ‘사상’이라는 단어. 반드시 지켜야할 것만 같은 ‘정치적 중립성’. 이런 말들 앞에서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어렵고 조심스러워졌다. 피해자들과 연대해야만 그들을 피해자로 만든 사회적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이제 그 필요성에는 다들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와 피해자를 둘러싼 사건이 정쟁화돼 진영을 가르는 기준이 됐을 때, 모두 함께 연대하기란 기만적인 관념일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슴에 달았던 노란리본의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일자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정치적 논쟁이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구제하는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일까.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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