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찬장에 방치한 썩은 캔햄

기사승인 2021-03-11 13: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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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찬장에 방치한 썩은 캔햄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내 자취방 찬장 구석에는 NPC같은 캔햄이 한개 있었다. 항상 멀끔한 포장을 두르고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지난 주말 마음먹고 대청소를 하다가 확인한 캔햄의 유통기한은 무려 2016년 2월까지였다. 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의 심정에 공감하며 캔을 뜯었고, 햄으로 만들어진 흉측한 생화학 무기를 보았다.

6년 전 어느 날 동네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할인 중인 캔햄을 산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언젠간 먹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오랜 방치가 시작됐을 것이다. 그동안 라면, 도시락 김, 즉석밥 등 다른 찬장 구성원들은 바쁘게 소비되고 새롭게 채워졌다. 캔햄은 혼자 ‘고인 물’로 남아 속내가 썩어버렸다.

캔햄 방치 사건과 비슷한 일이 찬장 밖 세상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제때 갱신되지 않은 글이 뒤늦게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 1월 서울시임신출산준비센터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된 임신·출산 관련 정보가 성차별적이라는 논란이 불거졌다. 게재된 글은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집에 남은 가족들이 먹을 밑반찬과 남편이 사용할 속옷, 생필품 등을 미리 준비해 두라’거나 출산 후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를 그나마 차분히 보이기 위해 머리띠를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2021년도의 통상적인 젠더 감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정보는 2018년도 이전에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작성해 대한산부인과학회의 감수를 받았던 글로 확인됐다. 과거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말들을 4년여간 묵혔다가 꺼내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흉측한 말들이 됐다. 서울시임신출산준비센터는 한바탕 뭇매를 맞고 허둥지둥 이 썩은 캔햄을 내다 버렸다.

사람도 썩은 캔햄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신선한 생각을 공유하며 쇄신하는 동안, 혼자 유통기한이 지난 가치를 붙잡고 사는 모습이다. 최근 동아제약은 지난해 채용 면접에서 한 면접관이 성차별적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져 비판받고 있다. 면접관은 여성 지원자에게 ‘여자는 군대 안 가니까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또 남성 지원자들에게 군 복무 관련 질문을 하며 여성 지원자를 소외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면접관이 신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10~20여년 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당연했다. 아쉬운 것 없는 입장인 면접관이 철저하게 ‘을’의 위치인 지원자를 함부로 대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 면접관은 그때부터 쇄신을 멈추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고이 간직해왔을 것이다. 2021년도에 우연히 발견된 동아제약의 썩은 캔햄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동아제약은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앞으로는 찬장과 머릿속을 매달 한번씩 정리하기로 했다. 둘 모두 주기적으로 먼지를 털어주고 재고를 파악해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 방치했다가 괴상하게 변질된 재고를 남에게 들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상한 식재료 정도야 부모님께 등짝을 몇 대 맞고 폐기하면 끝나겠지만, 조직과 사람의 도태는 되돌리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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