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역사, 왜곡된 허구 [친절한 쿡기자]

이준범 / 기사승인 : 2021-03-24 2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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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BS 캡처

“본 드라마의 인물, 사건, 구체적인 시기 등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SBS ‘조선구마사’ 방송 전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이 문장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드라마를 본 대부분 시청자는 기억 속 조선시대 역사를 떠올렸으니까요. 태종과 충녕대군 등 우리가 아는 역사 속 인물이 그대로 등장했고, 덕수궁과 광화문 등 지명도 익숙했습니다. 첫 방송 후 이틀 내내 거센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린 ‘조선구마사’가 엇나가기 시작한 첫 단추입니다.

‘조선구마사’는 실제 역사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쓴 드라마입니다. ‘판타지 퓨전 사극’을 표방하며 ‘조선 초기 혼란 속 인간의 욕망에 깃드는 악령이 깨어난다면’이란 상상력에서 출발한 드라마라고 제작사는 설명합니다. 현실과 허구를 섞은 퓨전 사극은 이전에도 많았죠. 조선시대에 서양의 엑소시즘을 결합한 시도는 신선합니다. 시청자들은 유독 ‘조선구마사’와 박계옥 작가에게만 냉혹한 걸까요.

박 작가의 전작 tvN ‘철인왕후’에서 쌓인 불신이 불씨였습니다. ‘철인왕후’는 실존 인물과 조선왕조실록을 희화화해 유머 코드로 활용하는 등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린 드라마입니다. 이를 두고 부정적인 비판이 쏟아졌고 드라마는 사과 입장을 밝히고 일부분을 수정해 방송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철인왕후’는 마지막회 시청률 17.4%(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죠. ‘철인왕후’ 종영 후 한 달 만에 ‘조선구마사’가 비슷한 논란에 시달리자 참지 못한 시청자들이 불만을 폭발시켰습니다. 단순히 작가가 잘해보려다 실수한 수준을 넘어 의도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죠. 드라마 측이 박 작가가 조선족이 아니라는 입장까지 전한 배경입니다.

사진=SBS 홈페이지

유난히 중국과 연관성이 많은 점도 문제가 됐습니다. ‘조선구마사’는 첫 회에서 의주 인근 기생집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중국 음식인 월병과 피단, 만두에서 시작해 인테리어와 음악과 의상, 헤어스타일, 칼 등 네티즌의 지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경덕 교수가 지적했듯, 최근 중국이 한복, 김치, 판소리 등 한국 고유의 문화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예민한 상황에서 오히려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 된 것이죠. 박 작가 전작인 ‘철인왕후’가 중국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도 의심을 불러왔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제작진 입장으로 막기 어려울 정도의 극렬한 반대 여론이 나온 이유입니다.

제목엔 ‘조선’이 들어가고, 자막엔 ‘허구’라고 적었습니다. ‘왕자의 난’ 등 실제 역사 사건을 언급하고, 태종이 환시에 시달려 백성을 죽이는 가짜 역사 사건을 보여줬습니다. 역사를 고증에 맞게 그대로 재연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이든 허구든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쓰는 안일한 태도가 화를 불렀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도 잘못 골랐습니다. 기록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를 마음대로 바꿔서 다시 쓰는 위험한 작업을 할 이유를 드라마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구마사’는 결국 24일 두 번째 공식 입장을 통해 실수를 인정하고 준비 부족에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첫 방송 후 이틀 동안 드라마에 붙은 광고가 다수 철회되고, 홈페이지 게시판에 수천개의 항의글이 쏟아지고, 방송사 재허가 취소를 촉구하는 국민청원에 3만명 이상이 동의한 결과입니다. 신뢰는 바닥까지 추락했고, 동북공정 드라마라는 낙인이 선명합니다. 1~2회 VOD가 삭제되고 일주일 동안 재정비를 거치며 ‘조선구마사’는 조금 다른 드라마가 될 예정입니다. ‘조선구마사’는 오해와 불신을 씻고 다시 시청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