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청춘’ 작가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길”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1-06-17 07: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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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청춘’ 작가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길” [쿠키인터뷰]
KBS2 ‘오월의 청춘’ 속 명희는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지 41년 만에 유골로 발견됐다.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그는 마침내 이름을 찾았다. ‘무명열사’로 옛 망월동 묘역에 묻힌 지 41년 만이었다. 그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가족은 그를 행방불명자로 신고했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행불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처럼 행방불명자로 신고했더라도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사례는 158명에 이른다.

지난 8일 막을 내린 KBS2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 속 명희(고민시)도 41년 간 이름 없이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그는 1980년 5월 어느 밤 계엄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광주 어느 공사장에서 발견된 유골이 명희의 것임을 알게 된 날, 그의 연인 희태(이도현)는 쪽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주님. 예기치 못하게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 슬픔에 남은 이의 삶이 잠기지 않게 하소서. 혼자되어 흘린 눈물이 목 밑까지 차올라도, 거기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소서.” 명희가 남긴 결혼 서약서였다.

명희의 서약서는 ‘오월의 청춘’을 집필한 이강 작가의 기도이기도 했다. 드라마 대본을 쓰기 위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던 이 작가는 “어느 순간 수많은 텍스트 뒤의 ‘남은 사람들’이 보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마주한 한 줄 한 줄의 기록이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투쟁이었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임을 그는 알았다. “제가 읽는 모든 증언과 자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눈물로써 남겨둔 기록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월의 청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가가 최근 쿠키뉴스와 서면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오월의 청춘’ 작가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길” [쿠키인터뷰]
남몰래 사랑을 키우는 명희(왼쪽)와 희태. 
‘오월의 청춘’은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평범한 이들이 겪은 5월”을 그리고자 했던 이 작가는 어린이 소설 ‘오월의 달리기’(김해원 글·홍정선 그림)를 각색해 ‘오월의 청춘’을 완성했다. 13세 소년 명수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원작과 달리, 드라마는 명수의 형·누나뻘인 20대 청춘을 주인공으로 불러냈다. 명수의 아버지인 현철은 원작에서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나오지만, 드라마에선 한국 전쟁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문을 받다가 오른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설정으로 바뀌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더욱 절절히 새겨진 셈이다.

“원작 이야기 중 아버지에게서 명수로, 명수에게서 계엄군으로, 그리고 세월이 지나 다시 명수에게로 돌아오는 회중시계가 마치 이어달리기의 배턴처럼 느껴졌습니다. 전후 세대였던 현철(김원해)에게서 1980년의 청춘이었던 명희, 그리고 다음 세대인 명수(조이현)까지 이어지는 그 달리기에서 기꺼이 서로의 바람막이가 돼주려는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의 끝으로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오월의 청춘’은 군부에게 희생당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군부에 맞선 운동가들도 조명한다. 수련(금새록)을 통해서다. 전남대 법대생인 그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고도 자본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아버지가 주선한 맞선을 피하려 꾀를 부렸다가 손발이 묶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며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수련을 말리던 오빠 수찬(이상이)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직접 경험한 뒤 생각을 고친다. 이 작가는 “‘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건 ‘두려워도 하는 것’”이라며 “지킬 게 있고, 두려움이 있음에도 신념을 위해 용기를 낸 모든 분께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오월의 청춘’ 작가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길” [쿠키인터뷰]
수련은 두려움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다.
“근현대사 속 민주투사들을 완전무결하고 정의로운 ‘타고난 투사’로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어리고, 실수하고, 두려운 게 많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수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수찬을 현실에 충실한 사업가로 설정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그저 가족을 사랑하며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내는 단단한 사람의 삶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그 5월에 그저 살아남았음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아픈 이들이 있다는 것을 수찬이를 통해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1980년 5월18일은 지나갔지만, 5·18은 끝나지 않았다. ‘오월의 청춘’ 마지막 회에서 중년이 된 희태(최원영)는 ‘5·18은 간첩의 소행’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착잡하게 바라본다. 현실도 다르지 않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종합격투기 선수는 5·18 희생자를 비하하는 말을 썼다가 사과했다. 광주를 짓밟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낸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5·18 묘역에는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 4구가 잠들어 있다.

“저희 작품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마지막 명희의 기도, 희태의 편지에 담겨있습니다. 지금도 ‘밀물의 삶’을 견뎌내고 있는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가길,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오월의 청춘’과 함께 눈물 흘려주신 시청자 여러분의 선하고 따뜻한 마음이 2021년의 현실을 사는 수많은 ‘희태’에게 답장처럼 가닿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KBS 제공, ‘오월의 청춘’ 방송화면 캡처.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