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성폭력 증거자료를 세상에 공개해야 하나요”

이소연 / 기사승인 : 2021-10-25 06: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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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쿠키뉴스 자료사진

[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성폭력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얻게 된 피해자의 정보로 2차 가해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스포츠인권연구소는 지난 18일 성명을 내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촉구했다. 연구소는 “조재범이 재판에 계류된 성폭력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광범위한 사적 정보를 적나라하게 언론매체에 제공했다”며 “이는 불법이자 피해자 흠집 내기를 통한 의도적 보복”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심 선수의 사적인 대화가 공개됐다. 경기 중 고의충돌 의혹과 국가대표 동료들에 대한 욕설 등이 담겼다. 공개 경위는 이렇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는 심 선수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달 항소심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심 선수는 성폭력 입증을 위해 검찰에 휴대전화 포렌식 내역을 제출했다. 이는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조 전 코치 측에 전달됐다. 이후 포렌식 내역을 바탕으로 작성된 변호인 의견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심 선수 사례뿐만 아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측도 재판 과정에서 얻은 피해자 의료 정보를 공개해 논란이 됐다. ‘해군 성폭력 사건’에서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개인정보와 검찰 진술조서, 일기·편지, 의료기록 등을 언론에 보냈다. 모두 피해자 동의 없이 이뤄진 일이다. 형사소송법 제35조에는 ‘피고인과 변호인은 소송계속 중의 관계 서류 또는 증거물을 열람하거나 복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   

피해자 정보를 보호할 법은 없을까.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은 피해자의 주소, 성명, 나이, 직업, 학교, 용모 그 밖에 피해자를 특정해 파악할 수 있는 인적사항이나 사진 등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 신상공개가 아닌 악의적 여론 조성을 위해 일부 정보를 공개한 경우, 처벌이 애매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쿠키뉴스 자료사진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가 떠안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지난 1월 발간한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 성과평가 및 개선과제 연구’에 따르면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 2차 피해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만 실효성 있는 제도 진척은 두드러지지 않는다”며 “여전히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해 소송 등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대응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현주 법률구조공단 울산지부 피해자 국선전담 변호사는 “재판자료가 유출됐다는 증거 등을 모두 피해자가 확보해야 한다”면서 “성폭력 피해를 처음부터 다시 진술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형사소송법과 성폭력처벌법 등에 따르면 재판장은 열람·복사에 앞서 개인정보 보호조치를 명할 수 있다. 성폭력 범죄 사건에서는 특히 피해자의 신원과 사생활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개인정보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

판사모임 젠더법연구회 재판다시돌아보기팀은 지난해 9월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을 진행했다. 포럼 참가자들은 “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을 보장하되 피해자의 신상이나 사생활 등에 관한 상황에 대해서는 피고인 및 변호인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어 “이미 존재하는 절차와 권리보장 규정이 재판실무와 동떨어져 있다. 또 법관이 그 취지를 제각각 해석해 적용하고 있다”며 “성범죄 재판에 대한 법원 밖의 평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는 제도 보완을 촉구한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재판과정에서 얻게 된 피해자의 정보로) 합의를 종용하거나 2차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잦다. 피해자가 순수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례도 있다”며 “성폭력 2차 피해의 경우 현재로서는 명예훼손 등 다른 법령으로 고소할 수밖에 없다. 처벌 규정도 약하다”고 꼬집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재판과정에서 획득한 피해자 관련 자료를 공개하거나 유포하는 행위를 강력히 제재해야 한다”며 “공개·유포로 인한 2차 피해도 양형 기준에 포함하는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피해자는 의료기록·탄원서·휴대전화 포렌식 자료를 제출할 때마다 ‘(가해자의) 열람·복사를 제한해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해야 한다”며 “피해자가 불안에 시달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