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눈물과 온기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1-11-09 16: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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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눈물과 온기 [친절한 쿡기자]
헌법재판소. 쿠키뉴스DB
“AI(인공지능) 판사에게 재판받는 게 낫겠다”

재판이 정치 권력과의 거래 대상이 되고 전관변호사가 재판 결과를 바꿉니다. 더이상 국민은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법농단으로 땅에 추락한 사법부의 현주소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퇴임 이후에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여전합니다. 후임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사를 통해 “사법부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 국민의 준엄한 명령임을 한시도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행보는 실망스럽습니다. 1년 넘게 진행된 사법농단 의혹 내부감사가 끝난 뒤 김 대법원장은 판사 10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당시 검찰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판단, 대법원에 넘긴 명단은 66명에 이릅니다. 이 중에서도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2월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현직 법관 8명 중 7명을 일선 재판부로 복귀시켰습니다. 비위법관이 누구인지, 징계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와 김 대법원장 대화 녹취록 공개 사건에 이어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의혹’에 전 대법관의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권순일 전 대법관인데요. 권 전 대법관은 지난해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단 때 무죄 편에 섰습니다. 대법관에서 퇴임한 후에는 대장동 개발 시행사 ‘화천대유’의 고문에 위촉, 자문료가 월 1500만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권 전 대법관은 이 지사 판결 전후로 수차례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와 접촉했습니다. 재판거래 혐의로 고발당해 수사 받는 중입니다. 법관 개인의 일탈 차원을 넘어 사법부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인데도 김 대법원장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법에 눈물과 온기 [친절한 쿡기자]
서울행정법원에서 지난달 28일 공개한 판결문 내용 일부. 서울행정법원

사법부 신망에 금이 가는 소식만 이어지는 와중에, 서울행정법원이 지난달 내린 한 판결이 화제입니다.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 이 판결문은 조회수가 600을 넘었습니다. 다른 판결문 서너배에 달합니다. 

사건 개요는 이렇습니다. 원고는 개인택시 운전기사, 피고는 서울특별시장입니다. 원고는 근무가 없던 날, 술을 마신 후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위치한 주차장에서 대리운전을 불렀습니다.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대리운전 콜센터 말에 GPS 위치가 수신되게 하기 위해 차를 5m 운전했다가 음주운전으로 적발됐습니다.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운전면허가 취소됐습니다.

원고는 지난해 8월 1종 보통 자동차 운전면허를 다시 취득했습니다. 서울시는 넉달 뒤 음주운전을 이유로 개인택시 운송사업 면허 취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에 택시 운전기사는 30년 동안 무사고에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며 가혹한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서울행정법원 제11부(재판장 강우찬 부장판사)는 택시기사 손을 들어줬습니다. 처분이 재량권 일탈·남용에 해당하여 위법하다고 봤습니다. 개인택시 운송사업 면허취소는 판단자가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재량행위로 규정돼있습니다. 재판부는 그 이유가 ‘수많은 개별적, 구체적 사정에 대한 고려를 입법에 포괄적으로 담을 수 없어서’라고 해석했습니다.

판결문 일부를 그대로 싣습니다.

“이 사건 원고의 운전경위나 구체적 사정을 고려해 보면, 원고의 준법의식이나 향후의 재범가능성, 안전운행과 관련한 위해가능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 원고의 한 순간의 실수는 공동체가 충분히 포용하거나 관용할 여지가 큰 것으로서 향후 그 공익 침해의 여지는 매우 희박하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원고와 그 가족은 그 생계수단 자체를 박탈당하게 되므로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입법자가 재량규정을 통해 법에 눈물과 온기를 불어넣은 이유는, 요즈음과 같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가 어려운 시절에 법의 일률성으로 인하여 혹여 라도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의 기회나마 부여할 수 있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려운 시절에 사회공동체가 건넨 그 한 번의 기회가 어쩌면 공동체의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바로 ‘법의 지혜’라고 하면 너무 과한 것일까

“판결문에서 인간다움과 따뜻함을 느낀다”. 한 시민이 남긴 글입니다. 결국 재판부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 냄새 나는, 그야말로 AI 판사는 할 수 없는 판결이겠지요. 판결문 한줄 한줄에서 느껴지는 판사의 인간적 고민.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가 아닐까요.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