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전정희 편집위원의 '러브& 히스토리컬 사이트'] 화가 박수근 부부와 양구(1)
남편 박수근을 살리려는 아내 김복순의 지혜...공산당에 온갖 수모

기사승인 2022-10-02 06:01:01
- + 인쇄
“이 아주마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당신 남편 박수근이 어디 있냔 말이야? 그런 악질 반동을 당장 못 내놓겠어!”

김복순은 솥뚜껑으로 후려 맞은 듯 정신이 아득했다. 얼굴을 안고 주저앉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는 내무서 외진 사무실에서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몇몇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희득희득 웃고 있었다. 수치스러웠다.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에 전시된 박수근 부부를 대상으로 한 설치미술 작품. 정림리는 박수근이 태어난 고향이다. 사진=전정희
“그 반동이 국군의 앞잡이로 위대한 인민군대를 비방하는 선전물을 그리 그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나. 아주마이도 포고문 봐서 알겠지만, 김일성 장군 특명으로 반동들 치하에서 무슨 일을 했든 자수하면 살려준단 말이지.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박수근이 어디 숨겼는지 말하라우.”

전형적인 반공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것도 한국 최고의 화가 박수근(1914~1965) 가족이 강원도 김화군 금성(당시)에서 겪은 일이다. 금성은 면 소재지로 일제강점기 금강산 관광을 위한 금강산전기철도 역이 있는 소읍이었다.

이 읍내 내무서에 잡혀 들어가 뺨을 맞는 치욕을 당하는 여인은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1922~1979)으로 춘천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1940년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금성감리교회에서 치러진 박수근-김복순 결혼식. 신랑 박수근의 오른쪽 바로 옆 안경 낀 사람이 한사연 목사이다. 화동들이 눈길을 끈다. 
반면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현 양구읍 정림리) 가난한 농사꾼의 장남으로 하루 빌어먹기가 힘든 전형적인 ‘감자바우’였다. 아버지가 광산업 사업을 하다가 망한 뒤 회복하지 못해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박수근은 양구공립보통학교 졸업이 학력 전부였다.

이 두 사람은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가 이 교회 한사연(1879~1950·독립운동가) 목사였다. 한 목사는 6·25전쟁 와중에 반동으로 몰려 아들 둘과 함께 즉결 처형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던 그가 막상 해방된 나라에서 이념을 이유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김복순은 금성에서 총각들 애간장을 태우는 빼어난 미모였다. 어릴 적부터 금성감리교회에 출석했고 교회 부설 금성유치원을 다녔던 부잣집 고명딸이었다. 그는 금성공립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 때문에 명문 춘천여고를 무시험으로 진학할 만큼 총명했다.

이런 그녀가 키만 멀대처럼 크고, 그림 그리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결혼 전 김복순은 늘 이렇게 기도했다.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1920~30년대 양구읍과 박수근 고향 정림리 일대 지도.

“하나님 제가 커서 시집갈 때는 우리 집처럼 부잣집에 시집 보내지 마시고 하루 세끼 조 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우애 있는 집안 신랑을 만나게 하옵소서.”

김복순의 아버지는 금성 읍내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기생집 ‘금성옥’을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 첩도 여럿이었다.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1920~30년대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면소재지가 있던 읍내. 박수근 김복순 부부가 신혼 살림을 차렸던 곳이다.

김복순은 40대 아버지가 자신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은 첩을 두는가 하면 기생집과 노름판에서 살다시피 하니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꼈다. 항상 슬픈 얼굴이었다.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 그가 가난하지만 훤칠하고 배려심 깊은 박수근을 만나 결혼했다. 결코 이루어질 혼사가 아니었다. 조 죽을 먹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 줄 수 있는 남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던 복순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니 부부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부는 1942년 아들 성소를 낳았다. 그해 박수근은 ‘조선미술전(선전)’에서 아들과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 ‘모자’로 입선했다. 이듬해에도 아내를 모델로 한 ‘실을 뽑는 여인’으로 입선했다.

1944년 첫 딸 인숙이 태어났고, 이듬해 해방과 함께 박수근은 금성중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부부에게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박수근은 금성 명소 십리장림(十里長林)이라는 긴 숲길에 나가 스케치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 금성 읍내 박수근 집 앞 신작로에는 1950년 초부터 탱크가 줄지어 철원 방향으로 향하곤 했다. 함경도 공업 도시 원산 함흥 흥남 등지에서 남으로 향하는 길목이 금성이었다.

당시 부부가 살던 김화군 금성면은 38선 이북이었다. 그들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느 순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이 되어 있었다.

1950년 봄. 독실했던 기독교 성도였던 부부는 공산 치하에서도 당연히 교회에 충실했고 한사연 목사를 따랐다. 한 목사는 그 당시 민주당 지역구 위원장이었다. 해방된 북한의 정치 지형은 김일성의 공산당과 조만식 선생의 민주당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부부는 두 내외를 친자식처럼 아끼던 한사연 목사의 권유에 따라 박수근은 김화군 대의원 후보로, 김복순은 면의원 후보로 입후보하여 똑같이 당선됐다.

당시 북한 기독교인들은 남쪽 방송을 몰래 들으며 자유주의 체제를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보위부의 감시가 따르기 시작했다. 조작과 함정이 이들 부부에게 늘 도사리고 있었다.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 전시관. 사진=전정희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박수근미술관'에 전시된 '박수근미술상' 수상작 '꽃수레'. 김주영 작가의 수상작이다. 사진=전정희

하지만 정치보위부와 공산당은 박수근 부부를 함부로 구속하지 못했다. 대의원과 면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부부는 훗날 "의원 신분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데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 초반 북한의 승세가 꺾이고 UN군의 폭격이 시작되면서 북한 주민들도 피난 행렬이 끝 간 데가 없었다. 부부는 요시찰 인물이 됐다. 당장 박수근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부부는 금성 읍내에서 몇십 리 떨어진 곳으로 일단 피신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위험을 직감하고 남편에게 산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라고 했어요. 그이는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집에서 잤어요. 그런데 어느 밤 빨갱이들이 따발총을 메고 들이닥쳤어요. 제가 시간을 끌기 위해 ‘누구세요, 옷을 입고 문을 열게요’하고 뒷문을 통해 남편을 도망가게 했어요.”

김복순의 생전 증언이다. 그는 이날 “남편은 원산으로 가고 나만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있다”라고 둘러댔다. 그들은 총부리로 김복순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위협했다. 그리고 내무서로 연행했다.

김복순은 뺨을 맞고 온갖 고문을 받았다. 두 살 아기 성인을 안은 채 수모를 당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다 풀려났다. 아마도 면의원이 아니었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지도 몰랐다.

한편 다시 산속으로 도망친 박수근은 일제강점기 징용을 피하던 사람들이 파 놓은 굴에서 몇 날 며칠을 숨어 지냈다. 김복순은 사람들 눈을 피해 남편에게 밥을 날랐다.

그렇게 숨죽이고 살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가 헐떡거리며 소식을 전했다.

“읍내에 국군이 들어 왔대요!”
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박수근미술관' 야외에 철사줄로 표현한 박수근 말년의 얼굴상. 사진=전정희


지난 24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이 태어난 마을엔 ‘박수근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 안은 ‘박수근미술관’이 자리한다. 부부의 묘도 이 공원에 자리한다.

이곳에서 김화 읍내까지는 100km, 자동차로 1시간 40분 거리다. 김화에서 금성까지는 25km 정도다. 한데 옛 강원도 김화군 군청이 있던 김화읍은 지금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이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김화와 금성 사이에 휴전선이 가로막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춘천여고에 진학했던 김복순은 금성~김화~화천~춘천을 다녔고, 박수근은 금성 읍내에서 시계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양구~화천~김화~금성 길을 밟았다. 한데 이 길이 접경 지역이 될 줄을, 그래서 6·25전쟁 때 목숨을 건 대탈출의 길이 될 줄 부부가 어찌 알았겠는가. <다음 회로 이어짐:매주 일요일 오전 6시 발행>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