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높아지는 상급종합병원 지정… 불안한 환자들

기사승인 2022-10-04 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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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병원이 기피하는 환자로 전락할까봐 두렵습니다.”

의료전달체계(Health care delivery system). 환자가 병·의원을 거친 후 종합병원에 가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가벼운 질환을 가진 환자가 종합병원으로 몰리면 정작 중증환자가 큰 병원에서 제때 적정한 진료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의료전달체계는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있다. 

그런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하겠다고 정부가 내놓은 방안이 되레 환자의 ‘진료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문턱 높아지는 상급종합병원 지정… 불안한 환자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박효상 기자


내년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중증환자 비율 더 높여야 ‘픽’ 

정부는 3년마다 상급종합병원을 지정한다. 상급종합병원이 되면 종합병원이나 병·의원과 똑같은 의료행위를 해도 ‘종별 가산’이란 장치를 통해 더 많은 진료비(건강보험 수가)를 받는다. 의료기관 위상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하반기와 올 상반기 두 차례 상급종합병원 평가협의회를 열어 ‘제5기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기준’을 확정했다. 여기에 의료전달체계 개선 의지를 담았다. 상급종합병원이 되고 싶은 의료기관이라면 지금보다 중증환자 비율을 높일 수밖에 없도록 지정‧평가 기준을 설계한 것이다. 

제5기(2024~2026년) 상급종합병원이 되고자 하는 의료기관은 전체 입원환자 중 전문진료질병군(A군)으로 분류된 환자 비율이 34% 이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30% 이상이면 됐다. 반대로 입원환자 중 단순진료질병군(B군) 환자 비율은 12%, 외래환자 가운데 의원 중점 외래질환(C군) 환자 비율은 7%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현행 기준보다 각각 2%p, 4%p로 낮췄다.

상대평가 기준도 강화했다. 4기 상급종합병원을 지정·평가할 당시에는 전체 입원환자 중 전문진료질병군 환자 비율이 44% 이상이면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5기부터는 50% 이상이어야 만점을 받는다.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의원 중점 외래질환 환자 비율은 2.5% 이하(4기 4.5% 이하)로 하향조정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내년 8~11월 평가를 진행하고, 같은 해 12월 5기 상급종합병원을 확정·공표할 예정이다.

상급종병 갈 수밖에 없는 비(非)중증환자 ‘난처’

상급종합병원이 경증환자보다 중증환자를 더 많이 진료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래야 상급종합병원의 중증질환 치료 역량이 높아진다. 또, 환자 쏠림현상을 완화해야 많은 중증환자가 적기에 치료받을 수 있다. 

다만 ‘A군’으로 부르는 전문진료질병군(중증질환)에 속하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상급종합병원이 아니면 진료가 어려운 환자들은 난처해질 수 있다.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 환자들도 그 중 하나다. CRPS는 심한 통증, 부종, 피부 변화를 수반하는 희귀난치질환이다. 현 질환분류체계에 따르면 CRPS의 경우 척수자극술, 펌프 사용 환자 등만 A군으로 인정한다. CRPS 2형(신경손상이 확인)은 B군, CRPS 1형(신경손상이 확인되지 않음)은 C군에 속한다.

이용우 CRPS환우회장은 “CRPS는 근본적인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치료가 가능한 병원이 제한적”이라며 “반드시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럼에도 (바뀐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기준에 따라) A군에 속하지 않는 CRPS 환자는 앞으로 병원의 기피 대상이 될 소지가 많다”고 우려했다.


문턱 높아지는 상급종합병원 지정… 불안한 환자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박효상 기자

의료진 “질환별 특성 반영해야”…복지부 “정책, 닫혀있지 않다”

CRPS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의 생각은 어떨까.

박휴정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교수는 “CRPS는 통증질환 중에서도 악성으로 분류한다. 암이나 심뇌혈관 질환처럼 A군에 속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상급종합병원이 되려면 A군 비율을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B군, C군에 속한 환자는) 피해를 받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최종범 아주대병원 교수는 “병·의원에 가서 CRPS환자라고 하면 예외 없이 큰 병원 또는 치료받던 곳으로 가라고 한다. CRPS환자는 사실상 A군에 준하는, 대학병원에서 봐야 하는 환자”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앞으로 CRPS환자들의 치료환경이 악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실을 반영한 보완책이 필요하다. 질환이 아니라 환자 상태에 따라서 ABC 질병군 분류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질환에 따라 ABC 분류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복지부 관계자는 “어떤 질병이 정말로 단순진료질병군으로 분류해서 치료하는 게 의학적으로 적정한지, 입원할 필요는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면서 “어떤 질환이든 의학적 부분은 전문가 검토를 받아서 언제든지 검토할 수밖에 없다. 정책적으로 닫혀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질병군 재분류는 대한병원협회, 대한의사협회 등에서 추천한 인물 등으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논의를 통해 결정한다. 이후 이의신청 절차 등을 거친 후 복지부가 고시한다.

신승헌 기자 ssh@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