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 생활을 탈취하는 의사는 쓸데없다 " 한국식 의료 헌장

근대 인술의 현장(7) 의사 오긍선과 경성보육원(상)
마마 앓은 5세 연상 아내와 평생 해로하며 도덕 실천

기사승인 2022-12-05 10:13:11
- + 인쇄
1937년 1월 대한제국기 서양 의학을 배운 한 의사가 ‘청년 의사에게’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권한다.

하나, 부자의 황금보다 빈자의 두 눈에 혹 눈물이 있을 것을 더 중히 여겨라.
일제강점기 경성보육원의 고아들. 남루한 옷차림이다. 뒷줄 오른쪽이 의사 오긍선.

둘, 의사가 병자에게 대한 것은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막연히 시험 삼아 하지 말고 매우 조심함으로 세밀하게 진찰하라.

셋, 항상 학술을 연구하고 병자의 신용을 받도록 유행을 따르지 말고 근거 없는 말을 하지 말며 허망한 명예를 구하지 말라.

넷, 매일 주간에 진료한 것을 야간에 다시 상세하게 생각할 것. 그리고 이것을 집성하여 서책을 작성할 것.

다섯, 불치의 병자라도 환고를 원행하게 하며 생명을 보존하게 할 것은 의사의 할 일이다. 이를 방기하고 불원함은 인도에 배반된다.

여섯, 병자의 비용이 적도록 하고 설혹 명을 구하여도 그 생활을 탈취한다면 쓸데없으니 빈민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 여섯 가지 충고 중 ‘직무에 충실’ 등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유사하다. 어쩌면 ‘조선 의사의 선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조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얘기가 된다. 일제강점기 피압박 민족에게 이러한 선언을 한 이는 1903년 조선 군산항에서 배편으로 미국에 도착, 켄터키주 센트럴대 의대(현 루이빌대 의대)에서 수학하고 서재필 김점동(박에스더)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한 오긍선(1878~1963)이다. 지금도 의학계에서는 피부과학 개척의 선구자로 불린다.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한 오긍선(1978~1963)

오긍선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계몽사상가이자 민족운동가, 의학자요 교육가이며 사회사업가이다. 1934년 그는 외국인이 독점하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의 첫 한국인 교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오긍선의 삶을 들여다보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다. 그는 평생 소외된 이웃에게 인술과 구제 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부터 공창제 금지 운동과 청소년 음주·흡연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나아가 대마초 등 마약 퇴치에도 앞장섰다.

또 도덕적으로도 자신에게 엄격했다. 의사인 아들 오한영(1898~1952)이 개인병원을 설립하려 하자 “의사가 이익을 추구할 목적의 개업이라면 반대”라며 말렸다. 당대 사대부나 지식인 대개가 첩을 두거나 기생을 끼고 살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자신보다 5세 연상인데다 마마를 앓아 곰보였던 아내와 평생 해로했다.

오긍선은 조선 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기 서양 의학을 배웠고, 일제강점기 가난한 이들에게 30여 년간 인술을 베풀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런 그에게 해방과 함께 숱한 권력의 ‘유혹’이 뻗쳤다. ‘경성보육원’과 ‘경성양로원’을 설립, 버려진 고아와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다.
일제강점기 경성 청운동 청운양로원 초기 모습. 애초 불교 신자가 시작했으나 재정난으로 의사 오긍선이 인수한다. 출전 법보신문
개화기 청운양로원 터. 지금은 현대그룹 정주영家가 들어서 있다. 이 자리가 한국 근대식 양로원의 시작이었고 한때 화가 나혜석이 말년에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1945년 9월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해리스가 서울 충정로 그의 집을 찾았다. ‘신탁통치’라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정을 단행했다. 특사는 오긍선에게 민정장관을 제의했다. 모든 권력이 그에게 쏠리는 순간이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지 나같이 정치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그가 권력이나 명예에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이란 걸 미국이 몰랐었던 듯하다.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로 인해 더러는 ‘외골수’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들의 입김이 막강할 때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선교사들의 잘못이 있으면 호되게 나무라는 성격이었다. 1927년 2월에는 미국 기독교 선교 잡지에 “한국에서 선교 기관이 운영하는 병원의 한국 이관이 필요하다”라고 기고할 정도였다.

해방됐다. 일제 말 조선총독부에 짓눌렸던 미국 감리회나 장로회의 권한이 복권되면서 한국의 정치적 지형도 미국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였다.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이 미국 유학파 오긍선의 한국에서의 위치를 아는지라 서로 안으려 했다.

맥아더 사령부도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통해 오긍선을 접촉했다. 그러나 오긍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자문관직마저 사양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실제 오긍선은 이들을 만났을 때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한 이후 우리나라의 공장 가동이 멈추었으니 남아 있는 일본 기술자들을 억류시켜서라도 우리가 기술을 전수 하여 공장 가동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부탁했다. 또 하루빨리 사립대학 설립을 인가해 교육을 통한 입국을 도와달라고 역 제의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어르신들을 섬기겠다고 했다.

미군정에서는 민정장관에 안재홍(독립운동가), 문교장관에 유억겸(연희전문 교장), 경무부장에 조병옥(독립운동가·전 연희전문 교수), 보건후생부장에 이용설(당시 세브란스의원 교수) 등을 임용했는데 원로였던 그의 기독교 민족주의 성향의 자문과 무관치 않다.

그렇게 본분을 지키고자 했던 오긍선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경성보육원(경성고아구제회 후신)과 경성양로원을 병합하고 ‘병 고치는 의사’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회사업가로 소천할 때까지 헌신의 삶을 산다. 
일제강점기 세브란스의학교 피부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오긍선. 지금의 연세대 의대 전신이다. 

 

의사 오긍선, ‘반민특위’에 자수했던 친일의 문제

조선총독부는 안정된 식민 통치를 위해 하층민 밀집 지역 통제를 위한 방면위원회를 운영했다. 빈민 구제가 명분이었으나 내용상으로 통치 목적이었다.

오긍선은 방면위 경성부 협의위원으로 위촉됐다. 세브란스병원과 학교가 속한 경성 서부 지역의 빈민 조사와 구제, 교육 등을 벌인다며 그를 끌어들였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은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 승격을 앞두고 있었다. 교장에 임용된 오긍선으로서는 내치지 못할 압박이었다. 일제는 강화된 교육 관련 법령으로 민족학교들을 정식학교에서 탈락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지식인에 대한 노골적 부역을 요구했다. 이때 오긍선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1941)으로 위촉되어 ‘임전 하의 정로(征路)’ 등 몇 편을 신문에 기고했다. 일생의 큰 오점이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법령이 공포됐다. 오긍선은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하고 조사받은 후 풀려났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