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규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페니맨을 만나다]

기사승인 2023-03-23 06: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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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페니맨을 만나다]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연습 중인 배우 송영규. 쇼노트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재벌 2세(디즈니+ ‘카지노’), 선배를 제치고 먼저 과장으로 승진한 강력반 형사(영화 ‘극한직업’), 잘 나가는 프로야구 단장(SBS ‘스토브리그’)…. 배우 송영규를 대중에게 각인한 캐릭터들이다. 날카롭고 지적인 외모 덕에 한때 ‘사짜(전문직) 전문 배우’로도 불렸지만, 과소평가는 금물이다. 송영규는 작품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오가며 배우의 가치는 배역의 크기로 매길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지난 1월부터 공연 중인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조연이지만, 악인에서 예술인으로 거듭나며 관객에게 웃음과 감동을 준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송영규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고향에 돌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환대받는 기분”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가 감격에 젖은 이유는 따로 있다. 2013년 연극 ‘갈매기’ 이후 10년 만에 돌아온 연극 무대. 뮤지컬로 연기 경력을 시작한 그에게 무대는 곧 고향이었다. 송영규는 “영화·드라마 촬영과 공연 준비를 병행하려니 양쪽 모두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무대에 오지 못했다”며 “사채업자였던 페니맨이 연극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듯, 나 역시 생존 경쟁이 치열한 야생에서 벗어나 예술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 중”이라고 말했다.

송영규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페니맨을 만나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공연 실황. 왼쪽이 송영규. 쇼노트

송영규의 무대 복귀는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다. 2007년 MBC ‘메리대구 공방전’으로 드라마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그는 배역 이름도 얻지 못했다. 당시 그가 맡은 역할은 출판사 사장. 대학 후배 강대구(지현우)의 무협소설을 책으로 냈다가 패가망신한 인물이다. “넌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더니, 나와 내 가족만 울렸다.” 그가 이런 대사를 치며 고개 숙일 때 시청자들은 배꼽을 잡았다. “원래 더 작은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작가님이 제 오디션 영상을 보시고는 분량을 늘려주셨죠.” 작품은 다른 작품을 잇는 다리가 됐다. 이번엔 ‘메리대구 공방전’을 눈여겨본 유현미 작가가 SBS ‘신의 저울’에 그를 캐스팅했다. SBS ‘추적자’, MBC ‘골든타임’, tvN ‘미생’…. 출연작 수가 늘수록 실제 이름보다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송영규는 “많은 분들이 ‘작품은 잘 봤는데 이름이…?’라고 묻는다”며 “내 이름보다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이러니 강윤성(‘카지노’), 윤종빈(넷플릭스 ‘수리남’), 장태유(SBS ‘하이에나’) 등 내로라하는 감독들이 송영규를 찾을 수밖에. 그에게 변신의 비결을 묻자 “사람마다 사연이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연기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어떤 작품이든 캐릭터의 전사를 그려놓고 연기해요.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버릇이 있는지 등을 상상해서 제게 투영하는 거예요.” 그에겐 흔히 말하는 ‘꼰대’ 기질도 없었다. 영감을 준 배우를 묻자 자신보다 10여년 후배인 조승우를 언급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2004)에서 처음 만났어요. 제가 그때까지 공부한 것들을 그는 벌써 다 느끼고 있더라고요.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대단했어요.”

송영규 “배역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페니맨을 만나다]
디즈니+ ‘카지노’ 속 송영규.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유튜브 캡처

지난해 공개된 출연작만 6편. 2021년부턴 대학 강단에도 서고 있다. 24시간이 모자랄 법도 한데, 송영규는 “(작품을 제안받으면) 거절을 잘 못한다”고 했다. 심지어 돈을 안 받고 출연한 작품도 있단다. 왜일까. 답은 간단했다. “절실함이 보이니까요.” 그에게도 기회가 절실했던 때가 있었다. 송영규는 드라마에 발을 들이고도 한동안 건설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고 한다. 삶이 한결 윤택해진 지금도 절실함을 잃지 않았다고도 했다. “연기가 뭔지 몰라 뭐든 배웠다”는 그는 “아직도 (연기가) 두렵고 떨린다. 그러니 더더욱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연기란 뭘까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일단 저를 솔직하게 봐야 한다고 느껴요.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내 가치를 스스로 높여야 해요. 그리고 상대에게 집중해야 하죠. 상대방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을 나누다 보면, 그 안에서 살아있는 뭔가가 나오거든요. 결국 좋은 연기를 하려면 좋은 사람이 먼저 돼야 하는 것 같아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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