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5)

마네는 ‘발코니’에서 무엇을 시도했는가?

입력 2024-02-19 10: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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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5)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69년, 캔버스에 유채, 170×12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운데 있는 남자는 풍경 화가 기유메. 그의 얼굴에 밝은 삼각형과 양 옆의 빛은 미술관의 외부 조명 때문이다. 

​마네는 ‘마네 부부의 초상’의 모델을 서던 1868년에서 1869년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실내와 야외를 배경으로 지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1869년 살롱전에 ‘화실에서의 점심 식사’와 함께 당선되어 또 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서른을 앞둔 모리조는 ‘발코니’를 시작으로 몇 년간 총 열두 점에 달하는 작품의 모델을 섰다. 

가운데 서 있는 남자는 풍경 화가 기유메(Antoine Guillemet)이고, 양산을 들고 있는 여자는 수잔의 친구인 비올리스트 클라우스(Fanny Claus)이다. 어두운 실내에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는 마네와 수잔 사이에 태어난 열여섯 살 린호프(Leon Leenhoff)이다. 

모리조는 어머니와 마네의 아틀리에를 열다섯 차례 방문하면서 모델을 섰다. 어머니는 작업실 구석에 앉아 수를 놓으며 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모리조는 완성작을 보고 자신의 못생긴 모습에 무척 놀랐다. 모리조는 검은 눈동자를 찬미하는 샤를 보를레르의 시를 헌사 받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화가로서의 재능도 마네에게 인정받은 시쳇말로 ‘육각형인간’이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5)
모리조의 목 주변 푸른 점 두 개는 반사된 미술관 조명이다. 서 있는 클라우스와 비교하면 그녀의 공허한 큰 눈과 이지적인 미모가 더욱 빛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누가 주목 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바뀐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와 미학자 바타이유, 그린버그 등 여러 학자들이 마네를 재발견하여 미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화가로 재탄생시켰다. 

대표적으로 푸코의 이론을 철학자 허경과 미학자 박정자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발코니’에서 모리조 옆에 서 있는 클라우스의 발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세 인물은 어둠과 밝음, 내부와 외부, 방 안과 바깥의 경계선 위에 매달려 있으며, 그들은 어떤 의미론 그림자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석했다. 

둘째, 한 공간에 있지만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세 모델의 포즈, 그리고 세 사람이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의 엇갈림’이 관람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전통적으로 인물들은 관람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지고, 화가들은 그림에 그려진 것이 전부가 아니고 무언가 다른 게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한다. 

그래서 관람자는 시선을 따라 화면으로 유인되고 그 시선을 따라 이동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마네는 세 인물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탈 중심적인 시선 처리를 했다. 

그 결과 ‘발코니’의 인물들의 시선과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셋째, 발코니 여인들의 흰 드레스에는 몇 개의 밝은 반사를 제외하고 아무런 그림자도 없다. 

이전의 그림에는 밝음과 어둠이 골고루 뒤섞여 있는 게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초록색 덧문을 경계로 빛은 전경에, 그림자는 후경에 몰려 있어 빛과 그림자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마네 이전의 회화에서 빛은 화폭 내부에 존재하며, 그로부터 그림에서 재현된 것들을 비춰줬다. 그러나 마네는 ‘조명’에 대해서도 실험하며 외부로부터 오는 빛이 발코니의 흰옷 입은 여인들에게만 비추고, 창문 안쪽의 사물과 인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게 비가시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런 효과는 이 그림의 조명이 화폭 외부에서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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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명과 같이 마네는 빛이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실내에서 차 주전자를 들고 가는 린호프를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그렸다. 

넷째, 발코니의 철제 난간과 덧문의 강렬한 초록색을 빼면 이 그림은 완전 흑백이다. 남자는 검은 양복이고, 두 여인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모리조는 일본풍의 자주색 부채를 들고, 클라우스는 초록색 양산을 들고 있다. 

서양미술사의 시대구분에서 15세기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미술을 통상적으로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라 지칭한다. 콰트로첸토에서는 회화의 배경은 짙은 색으로 하고, 인물들에 빨강, 파랑, 초록 등의 옷을 입히는 것이 상식이었다. 

인물은 색채로, 배경은 흑백으로 칠하는 콰트로첸토의 기법에서 벗어나, 마네는 정반대로 색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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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메의 파란 넥타이를 검은 넥타이라고 쓴 글도 있다.

다섯째, 창틀 및 발코니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사각형의 화폭을 가로지른다. 마네는 이런 과감한 배치를 통해 자신이 그리고 있는 직사각형 화폭을 화폭 내부에서 분할하고 다수로 만들어 강렬함을 부각시킨다. 

제목과 구도, 배치 등은 마네가 존경하던 스페인 낭만주의 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발코니의 마하들’과 휴양지인 항구 불로뉴(Boulogne)에서 본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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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발코니의 마하들, 1800~1814, 캔버스에 유채, 194.8x125.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젊은 마호(Majo, 스페인어 보통남자)를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여자인 두 마하(Maja, 스페인어 보통여자)가 발코니에 앉아있다. 반짝이는 흰색 공단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검은 비단 숄을 걸쳤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희고 투명한 만티야(Mantilla)를 쓰고 실크로 만든 속이 비치는 얇은 시폰(Chiffon) 소매의 투명함이 세련됨을 더한다. 여인들의 뽀얀 피부와 미모는 흑백대비로 더욱 돋보인다.​

볼그레 상기된 뺨과 아래를 향한 수줍은 시선이지만 어디선가 바라보는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다. 

작가 홋타 요시에는 ‘이들이 사형집행 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마호들의 야릇한 표정으로 인해 거리가 멀다고 언급했다. 

머리를 장식하거나 고정시키기 위한 빗, '페이네타(Peineta)'를 정수리에 꽂기도 하고 칼집에 든 단검을 왼쪽 양말 대님에 꽂아 감추고 있다. 언제라도 마호와 합세하여 싸움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뒤에 서 있는 마호는 귀까지 내려오는 검은 통 같은 모자와 망토와 외투로 몸을 감싸고 얼굴과 손의 일부만 드러낸다. 갈색 망토를 입은 사내는 겨우 눈과 코만 내놓고 얼굴을 더 가렸다. 

허리에는 커다란 칼과 권총을 휴대하고, 단검을 허리에 차도 모를 망토를 입었다. 이렇게 얼굴을 가리는 것이 유행이 되니, 가로등이 없는 마드리드에서 해만 지면 강도가 출몰하고 팔다리가 하나쯤 잘려 나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금이나 은 버클이 달린 구두를 신고 모자 속의 장발은 헤어네트로 단정하게 정리했다. 눈빛이 날카롭고 방어적인 태도를 지녀 앞에 있는 마하들의 빛과 색, 태도와 시선에서 확연히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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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조의 여동생 또는 바이올리니스트라 잘못 알려진 비올리스트인 파니 클라우스는 얼굴만큼 큰 꽃 때문에 인물과 사물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비평을 받았다.

난간 뒤에 인물들이 원근법 없이 배치되어 정물화 같다는 비난도 하였다. 모리조 발치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강아지는 고정된 듯한 인물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필자도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인물들만 보았다. 그런데 강아지에 대해 언급된 글을 보고 강아지를 찾아보았고, 그런 기억이 이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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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조 옆에 강아지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면서 감정의 교류가 전혀 없는 인물들을 통해, 마네는 이런 심리적 거리감과 모호성을 현대 생활의 특징으로 표현했다. 

‘발코니’는 1884년 마네가 드루오 경매장에 내놓은 것을 화가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정부에 유증했다. 

이십 년 동안 마네가 줄기차게 새로운 조형언어를 실험했던 이면에는 고집스럽고 반항아다운 성격도 한몫했다. 

또 부르주아 계층에서 성장하며 예술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며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할 수 있었던 출신 배경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마네는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제적인 자유도 있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5)
르네 마그리트, 원근법 2: 마네의 발코니, 1961, 캔버스에 유채, 80x60cm, 벨기에 겐트 왕립미술관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마네의 ‘발코니’에서 영감을 받아 82년 뒤 이 작품을 그렸다. 마그리트는 푸코의 <말과 사물, 1966>의 이론에 동조하여 편지를 주고받는다.​

"마네가 하얀 인물을 보았던 그곳에서 내가 관을 보게 된 것은 내 그림이 드러내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 이미지 속에는 발코니의 장식은 관과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여기서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학술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타당하고 명쾌한 설명을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신비로운 측면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발코니를 주제로 그린 고야,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받은 마네, 마네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본 마그리트의 작품을 감상했다. 이러한 일련의 그림 속에 담고 있는 시대 정신과 조형언어는 다르지만, 누구보다 날카롭게 통찰하는 예술가의 의지에 따라 그것들은 계속 변주되며 직관적인 미학을 표현한다. 

철학자들이 미술을 빌려 비로소 자신의 개념에 삶의 구체적인 무늬를 붙이게 되었을 때 예술가의 작품도 빛을 얻는다. 또한 예술의 해석과 감상은 어느 한 가지 방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뀐다.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 비추어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를 통해 삶과 작품을 재평가한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