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10)

기사승인 2020-11-21 0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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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고창 사람들은 모양성이라고 부르는 고창읍성의 정문은 북문이다. 북문의 누각인 공북루의 이름에는 북쪽의 임금을 두 손 모아 공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창 사람들은 고창읍성을 모양성이라 부른다. 어쩌면 이곳 지명에 관한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남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창은 삼한 시대엔 마한의 54 소국 중 하나인 모로비리국이 시작된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리다가 고려 시대부터 고창현이 되었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성안에서 보이는 공북루의 나무 기둥은 어떤 이유인지 높이가 다른 주춧돌 위에 올려져 있다.

고창읍성의 축조 시기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고창읍성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는데 이 책이 성종 17년에 나왔으므로, 성벽에 새겨진 계유년을 근거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을 한다. 그러나 성벽의 축성법을 근거로 선조 재위 6년인 1573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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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의 둘레는 약 1.7km인데 북문으로 들어가 왼쪽 성벽 위를 몇걸음만 걸어가면 고창읍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창읍성은 조선 시대의 성 중 성곽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성이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며 성안의 시설과 건물은 거의 모두 무너졌다. 근대 이후 고창여중과 여고가 성안에 자리를 잡았다. 고창읍성의 발굴과 복원이 1976년 시작되면서 학교는 성 밖으로 이전했고 과거에 있었던 22동의 건물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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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걸어 동문 근처에 이르면 소나무숲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곧게 자라지 않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자라면서도 다른 나무들이 자랄 적당한 공간을 양보하며 내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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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가까운 곳의 소나무들은 안쪽의 가지를 다른 소나무에게 양보하는 대신 성벽 밖의 넓은 곳으로 나뭇가지를 한껏 키우고 있다.

고창읍성을 출입하는 문은 정문 격인 북문과 고창의 동쪽에 우뚝 솟은 방장산 방향의 동문 그리고 서문이 있다. 북문에는 공북루, 동문에는 등양루, 서문에는 진서루가 복원되어 있다. 정문의 누각인 공북루는 ‘두 손을 맞잡는다’는 뜻을 가진 공 (拱) 자와 북쪽을 뜻하는 북 (北) 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북쪽의 임금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고창읍성은 성벽 밖의 둘레길을 걸을 수도 있는데 둘레길 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성벽 공사를 담당한 고을의 이름을 새긴 표지석을 시작점과 끝점에 설치해 두었다.

고창읍성의 둘레는 약 1.7 km이고 현재는 성곽 위를 걸을 수 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여인네들이 성을 걸을 때 손바닥 크기의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고 한다. 행여 머리에서 돌 떨어질세라 집중하며 세 바퀴, 5km쯤 걸으면 그 운동 효과가 작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성곽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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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에서 성벽 위를 걷기 시작해 서문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높이 솟은 대숲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의 대나무는 두 손으로 감싸야 할 정도로 굵고 매우 높이 자라 올랐다. 

성곽이 생각보다 넓지 않은 데다가 성벽 바깥쪽에 설치되는 성가퀴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잠시 걷다가 돌아보니 시야가 멀리까지 내닫는다. 야트막한 언덕 정도의 높이인데 고창읍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고창 시가지의 동쪽에 높은 담처럼 우뚝선 방장산 줄기가 듬직하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대숲에 갇힌 나무는 가지를 완전히 포기한 채 대나무에 의지해 키 크기에 온 힘을 쏟아 대숲 위로 겨우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햇빛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곽을 걸어 동문을 지나면 굳이 성 밖의 경치를 볼 필요가 없다. 성벽 안쪽에 흙을 돋우고 그 경사지에 심은 소나무 숲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근사’ 이상이다. 혹 안개라도 슬쩍 스며드는 날이며 꿈꾸는 듯한 풍경에 정신이 아득하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휘어지면서도 서로 양보하며 자리를 잡은 그 줄기에 햇살이 부딪치면 푸른 솔잎과 함께 그대로 동양화가 된다. 때로는 성 위로 큰 가지를 휘영청 드리우고 지나가는 이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니 소나무 숲은 고창읍성이 품은 보물이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대숲을 따라 걷다 보면 소나무와 대나무가 대치하고 있는 좁은 오솔길을 만난다. 사람의 간섭이 없다면 오솔길은 곧 대나무 차지가 될 듯하다.

성벽 위로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가 드물어지기 시작하면 성벽에서 내려와 걸을 시간이다. 그리고 마치 언덕에 거의 다 올랐을 때 저쪽에 우뚝 솟은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나듯 높고 푸른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두 손으로 감아야 겨우 잡힐 만큼 두꺼운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하늘을 가린 잎을 볼 수 있다. 담양의 관방제림 근처에 있는 유명한 대숲이 부럽지 않은 숲이다. 그 우렁찬 대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돌다 보면 구불구불 어울린 솔숲과 조금의 휨도 허락하지 않을 태세로 위로만 솟아오른 대숲이 작은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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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거치지 않고 대숲을 따라 걸어 북문을 향해 걷다가 몇 그루의 낙락장송을 만나면 고개를 들어 그 가지를 살펴야 그 소나무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짧은 길에서 소나무를 보고, 또, 대나무를 보며 걷다가 언덕 위에 서면 아름드리나무 소나무들이 다시 낙락장송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복원된 건물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창을 배우고 있다. 선생이 한 소절 선창하면 아이들이 따라 하는데, 마치 무르익은 어느 봄날 추녀 아래 제비집에서 먹이를 받아먹겠다며 일제히 노란 부리를 한껏 벌리고 소리지르는 새끼제비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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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에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입/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이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뒤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에 세웠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함양의 상림에 남아있는 척화비.

그렇게 내려와 공북루 아래 서서 생각하니 성벽 걷기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랴. 여기 마스크를 쓰고도 왁자하게 이야기하며 투호에 여념 없는 아이들이 있고 저 위엔 우리 노래를 배우는 아이들이 있으니 그 가운데서 행복할 뿐이다. 어쩌면 고창여고와 중학교가 있었을 평지를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며 편안한 소나무 숲을 다시 감상한다. 성안에서 올려다보아도 그 어울린 모습이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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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의 정문 입구에 있는 이 집은 신재효의 대저택인 동리정사의 사랑채다. 특이하게 앞면은 둥근 목재를 썼고 뒷면은 사각형 목재를 썼다. 처음에는 원기둥으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암행어사가 신분에 맞게 법도를 지켜 집 지을 것을 요청하자 어사의 체면을 위해 집을 낮추고 뒷부분의 목재를 격이 낮은 사각 기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본래는 13,000 제곱미터의 대지에 안채와 14칸의 줄행랑채, 많은 부속 건물이 있는 대저택이었다. 마당으로 개천이 흐르고 커다란 석가산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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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 신재효 선생 추념비는 고창읍성 정문의 오른쪽에 있다. 신재효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을 정리해 현재의 판소리를 집대성했으며 많은 판소리 명창을 양성했다. 고창읍성 입구 근처에 동리국악당, 판소리박물관 등 동리 신재효와 관련된 국악 관련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읍성이 품은 아름다운 솔숲과 대숲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기사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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