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더스트맨’ 서울역 노숙인이 그리는 순간의 아름다움

기사승인 2021-04-02 07: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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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더스트맨’ 서울역 노숙인이 그리는 순간의 아름다움
영화 '더스트맨'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거리에 아름다운 마법이 펼쳐진다. 허름한 벽에 몰래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가 아니다. 페인트나 붓, 물감도 없이 먼지에 그림을 그리고 홀연히 사라지는 남자. 그가 그린 작품은 SNS에서 화제를 모으며 누가 왜 그렸는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 남자에겐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영화 ‘더스트맨’은 선택하지 않은 사고로 떠도는 삶을 선택한 태산(우지현)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두껍게 쌓인 차 유리에 그림을 그린다. 우연히 터널 벽에 그림을 그리던 모아(심달기)를 만난 태산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상처를 치유한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지만 그가 겪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제목이 ‘더스트맨’이지만 히어로 영화는 아니다. 희망도, 미래도 없이 노숙을 전전하는 태산의 가장 춥고 어두운 세상을 그리는 영화에 가깝다. 물론 제목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장면들이 있다. 몰래 차에 먼지 그림을 그리던 태산을 내쫓던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순간이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히어로 복장에 코웃음 치던 시민들이 그의 초능력에 놀라는 클리셰가 떠오른다. 아무 설명이 없어도 직관적인 감동을 자아내는 예술의 초능력이다.

[쿡리뷰] '더스트맨’ 서울역 노숙인이 그리는 순간의 아름다움
영화 '더스트맨' 스틸컷

‘더스트맨’은 세상을 등진 태산의 사연을 애써 설득하지 않는다. 태산의 아픔을 헤집는 대신 그가 머무는 세계를 그림으로 드러내며 치유한다. 개인의 이야기와 청춘의 은유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고 균형있게 그리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반면 익숙지 않은 전개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로맨스나 치유의 정체가 불명확해 혼란을 준다. 태산의 사연이 드러나는 과정 역시 클라이막스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스트맨’ 곳곳에 존재하는 공백을 음악과 미술이 메운다. 영화 속 등장하는 그림이 말보다 큰 힘을 주고 음악을 통해 증폭된다. 오랜 시간 남는 단단한 예술 작품과 달리, 생명력 짧은 순간의 예술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유한한 예술의 매력은 영화 주제와도 맞아떨어진다. 섬세하게 더스트 아트를 준비하고 음악을 선정한 감독의 고민이 눈에 띈다.

최근 독립영화에서 주목받는 배우들은 좋은 연기로 영화에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더스트맨’이 첫 장편영화인 배우 심달기의 연기는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난다. 우지현이 아무 색깔 없는 태산을 묵묵히 표현했다면, 심달기는 그 자체로 총천연색인 모아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7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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