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2021년, 인류가 남긴 ‘이것’ 화석이 발견됐습니다”

한성주 / 기사승인 : 2021-04-19 06:00:03
- + 인쇄

[우리는 오늘도 내일을 끌어쓴다] 주사기·플라스틱병·전자쓰레기·비닐로 기록될 오늘의 인류

<편집자주> 한살짜리 아기부터 대기업 회장님까지, 우리는 모두 지난해 8월22일부터 적자다. 이날은 지구가 제공하는 1년 치 자원을 다 써 버린 시점 '생태용량 초과의 날'. 나머지 4개월은 다음해 살림살이를 당겨 쓴 셈이다. 만성 적자의 대가는 재난과 불평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공공예술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과 함께 평등, 비거니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기후위기 세상을 톺아본다. 제로의 예술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공예술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 팀이다. 기후위기 문제를 의논하는 시민참여 강연·워크숍 프로그램 ‘우리는 오늘도 내일을 끌어쓴다’를 기획했다.

사진=폐전선, CD, 전자회로 등 전자쓰레기가 ‘인류세’ 화석 후보로 꼽혔다. 한성주 기자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 “서기 2만2021년, 우리은하 주민들은 연합탐사단을 구성해 태양계 조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구에 착륙한 탐사단은 행성 환경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섰습니다. 땅속을 살펴보기 위해 시추 작업을 실시한 지질조사팀은 지하 220m 지점에서 ‘인류세’로 보이는 지층을 발견했습니다. 지질조사팀은 인류세 지층 속에서 다양한 화석을 수집해 탐사단 본부로 복귀했습니다. 어떤 화석들이 발견됐을까요?”

인류세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킨 시기를 의미한다. 지구의 역사는 지층 속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인류세는 가장 최근의 지질시대 ‘홀로세’의 뒤를 이을 새로운 지질시대다. 기후 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활동을 성찰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새롭게 도입한 개념이다.

18일 최명애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연구조교수와 12명의 시민이 2만년 뒤 지질조사팀에 발견될 인류세 화석 후보들을 꼽았다. 워크숍은 서울 청계천로 세운청계상가에서 진행됐다.

참여자들은 각자 가져온 화석 후보를 소개하고, 사진을 촬영한 뒤 인류세 화석 등록서를 작성했다. 등록서는 화석 후보의 쓰임새, 생산-소비-폐기 과정, 인간에게 미친 영향, 주요 발견 지역 등 구체적인 질문으로 구성됐다. 스마트폰, 컴퓨터 메모리칩, 생활 쓰레기 등 다양한 후보들이 등장했다. 완성된 등록서는 워크숍장 벽면에 게시됐고, 화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를 가려내는 투표가 진행됐다. 

투표 결과 주사기, 플라스틱병, 전자쓰레기, 비닐 등 4점의 화석 후보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이들 화석 후보를 가져온 참여자들의 ‘발굴 소감’이 이어졌다.

참여자들이 인류세 화석 등록서를 읽고 투표하고 있다.  사진=한성주 기자

주사기를 가져온 혜신씨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백신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로 인해 앞으로 더 많은 신종 감염병이 주기적으로 발생할 거라고 예측했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코로나19 백신 한 가지만 맞고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오늘 코로나 백신 한방, 내일 다른 백신 한방, 모레 또 다른 백신 한방…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르죠. 주사기는 대체품이 없는 일회용품이니 굉장히 많이 소비될 거예요. 우리가 자초한 재앙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 쌓여 또 다른 재앙으로 닥쳐오는 셈이죠.”

플라스틱병을 가져온 문영씨는 인류세라는 단어를 듣고 곧장 플라스틱을 떠올렸다. 문영씨는 최근 생수 제품 소비를 중단하고 수돗물을 끓여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도 플라스틱병이 인류세를 대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가정 쓰레기의 40%는 생수나 유제품이 담겼던 플라스틱병이래요. 우리나라 사람 1명이 해마다 플라스틱병 132kg을 소비한대요. 그런데 국내 플라스틱병의 90%는 재활용되지 않고 땅에 묻히거나 소각되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지구가 플라스틱병으로 뒤덮일 수도 있어요.”

인류세 화석 후보로 플라스틱병을 가져온 문영씨가 발굴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한성주 기자

폐전선, CD, 전자회로 뭉치를 가져온 민아씨는 전자쓰레기가 이미 생활공간 여기저기에 쌓여있다고 말했다.

“전선이나 전자회로는 전자제품을 구동시키고, 디지털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물건이에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저장장치도 일상생활에 필수품이죠. 특히 전선은 전기를 공급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전선이 우리 생활공간을 칭칭 감싸고 있어요. 사용 주기가 짧아서 금방 폐기되고 새로 만들어내죠.”

비닐을 가져온 보름씨는 특히 ‘농업용 비닐’이 남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수백년 동안 비닐 없이 농사를 지었는데, 유독 현대 농업은 비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의 텃밭에 깔린 검은색 비닐을 보고 의문이 생겼어요. 비닐이 없고, 특별한 농업 과학 기술도 없었던 과거 사람들도 농작물을 잘 생산했잖아요. 지금 우리는 왜 비닐 없이 농사를 못 짓는 걸까요? 지구에 있는 모든 밭에서 철마다 엄청나게 많은 비닐 쓰레기가 나오고 있어요. 농부들이 언제부터, 왜 비닐을 쓰기 시작했는지 돌아봐야 해요.”

최명애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연구조교수가 기후위기와 인류세를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대안적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성주 기자

발굴 소감 발표가 마무리된 후 참여자들의 의견 교환이 이어졌다. 열띤 토의가 진행되던 도중,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경청하던 전문가의 전공지식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최 교수는 “사실 오늘 본 화석 후보들은 모두 1만년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라고 실토했다. 얄짤없는 진실을 마주한 참여자들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전 세계 지질학자들이 모이는 국제지질학연맹(IUGS)은 국제층서위원회(ICS)의 전문가 그룹 ‘인류세 워킹그룹’을 구성해 연구한 끝에 인류세를 공식 지질시대로 등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짓는 ‘황금못’으로 방사성 낙진을 꼽았다. 황금못은 지질시대를 나누는 기준점이 되는 화석이나 지질학적 변화다. 이전 시대에는 전혀 관찰되지 않았던 새로운 특성이며, 수만년간 보존될 수 있어야 황금못으로 선정될 수 있다.

유력한 황금못인 방사성 낙진은 핵폭탄 폭발로 발생한다. 핵폭탄이 폭발하면 지상의 다양한 물체가 파괴되고, 방사능으로 오염된 분진이 발생한다. 상공에 떠오른 분진이 지상으로 다시 가라앉는 것을 방사성 낙진이라고 부른다. 인류가 핵폭탄을 발명하기 이전까지 방사성 낙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방사성 물질 가운데 우라늄의 반감기는 45억년, 플루토늄의 반감기는 2만4110년이다. 반감기는 방사성 물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역사상 최초의 핵폭탄 폭발은 지난 1945년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진행된 원자폭탄 실험이다. 상공에 떠돌던 방사선이 지상으로 내려와 토양에 스며드는 시간을 약 7년으로 계산하면, 인류세의 시작점은 1952년으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맞추기 어려운 정답이었다는 의견과 방사성 낙진을 가져온 참여자가 없다는 사실에 워크숍 현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최 교수는 화석 후보를 상상하는 활동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류세 너머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근대적 방식에서 벗어난 대안적 사고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기후 위기와 인류세를 무사히 통과하려면 우리가 모르는 미래를 상상해내야 한다”며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환경과 인류세를 주제로 대화하고, 다른 형태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