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에 등장한 아시아 혐오 범죄…할리우드는 반성 중

기사승인 2021-04-24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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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에 등장한 아시아 혐오 범죄…할리우드는 반성 중
미국 NBC 드라마 ‘뉴 암스테르담’에서 아그네스 카오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챙.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미국 뉴욕 한복판에 있는 공립병원 ‘뉴 암스테르담’.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 아그네스 카오(크리스틴 챙)는 환자를 진찰하다 기시감을 느낀다. 가벼운 접촉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환자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환자가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필리핀계 미국인인 여성 환자는 길을 걷다가 두 남성에게 복부를 구타당했다. 남성들은 이 여성이 미국에 바이러스(코로나19)를 퍼뜨렸다고 주장했다. 아시아계인 카오 역시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공격당한 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 사건을 남에게 말한 적 있느냐는 동료 의사의 질문에 카오는 답한다. “아니요. 이런 일은 우리에게 너무 많이 벌어지는걸요.” 최근 방영된 미국 NBC 방송사 드라마 ‘뉴 암스테르담’ 시즌3 에피소드 ‘피 땀 눈물’의 내용이다.

미국 내 아시아계 혐오 범죄를 직격한 이 에피소드는 배우 크리스틴 챙의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타이완계인 챙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산 초기 식료품점에서 낯선 이에게 이유 없이 폭언을 들었다. 운전을 하다가 낯선 이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피 땀 눈물’ 편을 기획한 ‘뉴 암스테르담’ 공동 제작자 겸 작가 라작은 최근 화상 간담회에서 “지금은 아시아계를 향한 편견을 부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 암스테르담’에서 외과의사 카시안 신 역으로 등장하는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킴은 “정치적 입장은 제쳐두고 인류에 관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발생한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할리우드는 ‘자성 모드’다. 라작이 지적한대로, “할리우드는 지난 수십 년 간 아시아계에 관한 해로운 편견을 강화하는 데 앞장 서왔다.”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2)에서는 일본인 캐릭터 유니오시가 뻐드렁니를 가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됐다. 하이틴 로맨스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에선 아시아계 여학생 두 명이 체육 교사와 은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미국 유명 방송인 제이 레노는 ‘아시아인은 개고기를 먹는다’며 10년 이상 여러 차례 조롱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한 미디어 액션 네트워크’(MANAA)에 따르면 레노는 지난 2월 이 단체를 통해 “마음속으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 ‘농담도 못 받아들이면 그건 당신들 문제’라고 반박해 왔다”며 사과했다.

'미드'에 등장한 아시아 혐오 범죄…할리우드는 반성 중
엘런튜브 홈페이지에 신설된 ‘아시아계 혐오 반대 돕기’ 코너.
방송사는 소외됐던 아시아계에게 메가폰을 쥐어주기 바쁘다. 미국 유명 방송인 엘렌 드제너러스가 진행하는 NBC ‘엘렌 드제너러스 쇼’는 아시아계 노인들에게 식사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활동가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파트너사를 통해 2만 달러를 후원했다. 동남아 문화를 바탕으로 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 주인공 라야 목소리를 연기한 베트남계 배우 켈리 마리 트란과 아동·청소년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운영 중인 중국계 농구선수 제레미 린도 이 프로그램에 다녀갔다. 제작진은 디지털 플랫폼 ‘엘렌튜브’에 ‘아시아계 혐오 반대 돕기’(Help #StopAsianHate) 코너도 신설했다. NBC ‘세터데이 나잇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의 첫 중국계 출연자인 코미디언 보웬 양은 최근 이 프로그램 ‘위켄드 업데이트’(Weekend Update) 코너에서 아시아계 혐오 범죄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갈 길은 아직 멀다. 그간 더 많은 아시아계가 미디어에 등장해야 한다. 대니얼 대 킴은 “실제로 의료계에 종사하는 아시아계는 많지만, TV에 나오는 건 그들 중 극소수뿐”이라며서 의학드라마를 비롯한 TV 방송에서 아시아계가 더욱 많이 조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남캘리포니아대 애넌버그 혁신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영화·드라마 등을 포함한 작품 속 캐릭터 가운데 아시아계 비중은 5.1%에 불과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2016),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원작에서 아시아인으로 설정된 인물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계를 조명하는 방식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는 올해 초 미국 로스앤잴레스에 사는 부유층 아시아계 8명의 일상을 담은 리얼리티 ‘블링블링 엠파이어’를 공개했다가 현지 언론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아시아계가 높은 실업률에 고통 받는 상황에서 상위 1%의 삶을 과시하는 건 모욕적’(NBC)이고, ‘출연자의 재력을 핑계로 아시아계를 타자화한다’(할리우드 리포트)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에밀리, 파리에 가다’ 속 중국인 캐릭터 민디(애슐리 박)를 두고 “중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인물이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처럼 묘사됐다”며 “민디 캐릭터를 알리는 문화적 특수성이 부족해, ‘모든 아시아계는 동일하다’는 인식을 준다”고 비판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NBC ‘뉴 암스테르담’ 유튜브 채널, 엘렌튜브 홈페이지 캡처.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