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프레스] ‘탈(脫) 표준’의 삶, ‘탈(脫) 가정 청년’ 취재기

다양한 삶이 논의되는 사회를 바란다

기사승인 2021-05-31 15: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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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프레스] ‘탈(脫) 표준’의 삶, ‘탈(脫) 가정 청년’ 취재기
[쿠키뉴스 유니프레스] 고병찬 연세춘추 기자 = 지난해 말, 지인에게서 한 학우가 「연세춘추」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지속된 가정폭력과 빈곤으로 부모와 인연을 끊은 A씨의 사연이었다. 그는 일련의 일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A씨의 이야기를 지면에 그대로 실을 순 없었다. 사회면 기사로 싣기엔 지극히 개인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정책 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 의제로써 승화되지 않으면 동정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접한 ‘탈가정 청년’이라는 의제로 A씨 사연을 기사화할 수 있었다. 탈가정 청년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가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가정폭력, 가정불화, 성폭력, 아웃팅, 파산 등으로 탈가정 경험이 있거나 이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청년 혹은 탈가정을 희망하는 청년’을 말한다. A씨처럼 원가정과 단절했거나, 단절하길 원하는 청년을 일컫는 것이다.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서울시 청년청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탈가정 청년은 꽤 많은 청년이 직면하는 상태였다. 실태조사팀이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응답자 200명 중 45.9%가 탈가정을 경험했거나 시도 또는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탈가정 청년이 원가정과의 단절을 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A씨처럼 잦은 가정폭력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정서적 단절까지 이룬 경우, 부모가 성소수자인 자식의 정체성이나 신념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아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는 경우 등이다. 이들에겐 원가정과의 교류가 안정과 지지가 아닌 폭력과 핍박이다.

당사자들은 공통으로 탈가정이 생존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이 부모와의 연을 끊는 일까지 감행하면서 집을 나선 이유다.

A씨는 “완전한 단절이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탈가정을 실행한 이들이 겪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가정을 뒤로하는 순간, 경제적, 심리적 문제가 밀어닥친다.

그들이 가장 크게 호소하는 어려움은 정서적 문제다. 원가정이 담당했던 연결감과 정서적 돌봄이 사라지고, 불안정해진 생계유지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또래 청년들과 완전히 다른 생애주기를 가지는 점은 심각한 고립감과 박탈감의 원인이다.

청년정책네트워크에서 당사자로서 탈가정 청년 담론을 처음 제시한 박주현씨는 “직접 만난 탈가정 청년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며 “또래 청년들이 동아리를 하고, 스펙을 쌓을 때 생계유지를 위해 알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맘 편히 기댈 수 있는 정책 지원은 거의 없다. 기존 청년정책 대부분이 원가정 배경을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국가장학금, LH 주거 지원 등이 예다.

박씨는 “만 28세인데도 부모 서명을 받아오라는 곳도 있다”며 “가족주의적인 정책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가족과 연결지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탈가정 청년이라는 의제가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책이 나오기는 어렵다. 정책 영역에선 현실에 맞게 고려할 요소가 한둘이 아니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김선기 연구원은 “현재로선 탈가정 청년정책 지원이 도입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며 “일단 담론 의제로서 이 이슈에 주목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리고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야 생존의 경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당사자를 호명하고, 최소한의 지원책이라도 강구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숨어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관련 정책에 관한 논의도 촉발될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 인식과 정책 대상은 여전히 ‘표준의 삶’에 맞춰져 있다.

A씨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 왜 말이 없는지 화가 났다”며 “대학 사회에서 ‘표준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의제들만 논의되고 있다. 표준적이지 않은 삶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대학 사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탈가정 청년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형태를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적어도 박탈감은 느끼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 ‘표준이 아닌 삶’도 활발히 논의되는 사회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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