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 엄마도 임영웅 덕질한다

임지혜 / 기사승인 : 2021-06-14 05: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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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밍·조공·기부 서포트'까지…젊은 세대 덕질과 판박이
다양한 취미 활동 즐기는 '오팔세대'

사랑의 콜센타 미스터트롯-미스트롯2 특집. 연합뉴스=TV조선 제공
[쿠키뉴스] 임지혜 기자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임영웅의 미스터트롯 예선전 곡 '바램' 가사)

엄마의 휴대전화 벨소리로 가수 임영웅의 '바램'을 설정했다. 전화벨이 울리면서 임영웅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부모님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일상을 진동모드로 살다가 갑자기 유료 벨소리를 결제한 건 2000년 '흔들린 우정'으로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가수 홍경민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이후 찬송가 외엔 듣지 않던 엄마에게서 나온 의외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후 1년이 넘은 현재까지 친정 엄마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임영웅, 친정 아빠와 시부모님의 벨소리는 가수 영탁의 노래다. 

음원 결제창을 마주한 엄마에게서 내 어릴적 시장 콩나물 가격을 깎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우리 영웅이 노래를 위해서"라며 아낌없이 결제 버튼을 누른다. 

중년의 '덕질(한 분야에 푹 빠져 열중하는 것)'은 1020세대의 덕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가 출연하는 TV프로그램의 본방 사수는 물론이고 관련 기사를 전부 확인하는 것도 기본이다. 

SNS로 덕질하는 젊은 세대와 달리 밴드, 오픈채팅을 주로 활용한다. 플랫폼은 조금 다르지만 '스밍 총공(음원 스트리밍 총공격)' '기부 서포트' '조공(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 '굿즈' 까지 젊은 세대의 팬 문화와 똑 닮았다.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들을 응원하는 한 오픈채팅방은 백여명이 넘는 팬 중 대다수가 5060세대다. 이들은 '건행' '탁모닝(아침인사)' '찬나잇(저녁인사)' 등 신조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스케줄을 줄줄 꾄다. 좋아하는 가수의 차트 순위를 높이기 위해 스밍을 독려하고 이를 인증하기도 한다. 채팅방에 있는 10대 중고등학생 팬들과의 대화를 보면 이들 사이에 세대의 벽은 없다. 

이들은 덕질로 인생에 살맛이 생겼다고 입을 모은다. 50대 여성 유모씨는 "손녀를 돌봐주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 적적했는데 사랑의 콜센타(TV조선 예능)을 보면서 활기를 찾았다"며 "손녀가 없는 시간엔 계속 노래나 방송을 틀어 놓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50대 여성 김모씨는 "임영웅의 노래를 듣고 한순간에 빠져들었다"면서 "아들에게 도움을 받아가며 음원 사이트에 가입하고 인터넷을 통해 스밍 방법을 배웠다. 태블릿PC들도 동원해 온종일 유튜브를 켜놓기도 한다.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이렇게 최선의 응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했다.

임영웅 팬카페 '영웅시대'와 은가은 팬카페 '은가더러브' 회원이라고 밝힌 60대 남성 임모씨도 "일이 끝나면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는) 본방 사수는 물론 재방송까지 다 챙겨본다"면서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팬카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년의 덕질은 트로트 장르에만 머물지 않는다. 차트 역주행 신화를 쓴 브레이브걸스는 중년 남성 팬층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국내를 넘어 이제는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이 된 방탄소년단(BTS) 팬덤 '아미(ARMY)' 중에서도 40대 이상 팬이 적지 않다. 지난해 60대 배우 김갑수는 BTS 팬 커뮤니티인 위버스에 "나도 아미야"라는 글로 팬임을 인증하기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웅시대 안동 스터디방 희망나눔 성금 기탁. 영웅시대 밴드
이처럼 5060세대 신(新)중년의 삶은 달라지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 또는 '오팔(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세대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젊은 세대 못지 않게 트렌드에 밝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기는 활동적인 중년들이다.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생 개띠의 58과 발음이 같다. 

이들은 '뒷방 늙은이'가 되기를 거부한다. 젊은 층 못지않게 인터넷과 스마트폰 활용에 익숙해 온·오프라인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자신을 위한 소비에도 아낌이 없다. '덕질'도 이런 활동 중 하나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사회에 진출해 경험을 축적한 만큼 오팔세대는 이전 세대의 배경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졌다. 이전과 달리 건강과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축적된 부가 많아 여가·문화생활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크다.  

통계청의 '2020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연령대별 평균 순자산은 50대 가구가 4억987만원으로 가장 많고 60대 가구가 3억7422만원으로 뒤를 잇는다. 또 국민연금 수령 연령에 접어들어 은퇴 후에도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자료=하나금융경영연구소 '트로트 열풍으로 보는 오팔세대의 부상과 팬덤경제' 보고서
덕질이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다는 보고도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트로트 열풍으로 보는 오팔세대의 부상과 팬덤경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오팔세대의 팬덤은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고 위안을 얻는 수단으로 관련된 소비에 매우 적극적이며 지속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팬클럽 활동을 통한 네트워킹과 소비를 통해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나를 표현함으로써 사회생활을 할 때와 같은 활력을 느낀다"고 평가했다. 

이에 일부 자녀들은 부모의 취미 생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모습이다.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의 팬카페에는 부모를 대신해 스밍을 하고 있다는 자녀들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30대 여성 이모씨는 "임영웅 팬인 부모님에게 미스터트롯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선물해 드렸는데 아이같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신기했다"면서 "음악을 듣고 방송을 보며 삶에 활력이 넘치시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임영웅이 지난 3월 내놓은 신곡과 팬카페 이야기를 나눴다. 팬심은 여전하다. 30대인 나보다 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젊음과 늙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