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기사승인 2021-06-13 04: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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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 축성 책임 묻는 '각자성석', 오늘 날 '공사실명제'
- 암문(暗門) 만들었다는 공식기록 없어
-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근본적 인식변화 필요
-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와 함께 떠난 순성길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쿠키뉴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수도 서울 도심부 경계를 따라 인왕‧백악‧낙산‧목멱 등 내사산의 높고 낮은 능선과 평지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성벽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지혜가 깃들어있다. 오늘 날도 한양도성은 600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며 서울을 품고 있다.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총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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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전하는 서울시가도. 제작자 이름과 목판의 판각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략 184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개일까?
한양도성의 성문은 세 종류다. 사람이 출입하는 주출입구인 8개의 문과 어느 시기에 몇 개나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암문,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 그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한 후 먼저 궁궐과 종묘사직을 완성했다. 이어서 태조 5년인 1396년, 전체 길이 18.6km의 한양도성을 쌓았다. 평균 높이 4.5~7.5m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2개의 수문, 5개의 치성과 2곳의 곡성, 봉수대 등을 만들었다. 암문(暗門)을 만들었다는 공식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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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야경/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국보1호’ 숭례문과 ‘보물1호’인 흥인지문 밖에 없다.

▷ 4대문(大門)과 4소문(小門)
도성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문을 만들었다. 사람의 다섯 가지 덕목으로 꼽는 인,의,예,지,신을 방위에 맞추어 4대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숙정문(肅靖門/북대문)에 이름을 붙였다. 그 중 ‘신’은 사대문 가운데인 보신각(普信閣)에 붙였다.

4소문은 현재 혜화문(惠化門)으로 불리는 동북의 홍화문(弘化門/동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남소문),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서북의 창의문(彰義門/북소문), 서남의 소의문(昭義門)으로도 불렸던 소덕문(昭德門/서소문)이 있었다.
사소문 중 남소문에 해당하는 광희문은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1457년(세조 3년) 때 만든 남소문이 있어서 따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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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돈의문 전경, 1915년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일제 강점기, 성벽 철거와 함께 돈의문은 250엔의 헐값에 경매로 넘어가는 등 도성의 문들도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6,25 전쟁 이후 숙정문과 혜화문, 광희문 등은 복원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지만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어 그 자리에 표지석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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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간수문이 있던 위치에서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 좌측 벽면에 모형으로 만들어 논 오간수문(五間水門)

 ▷한양도성의 물길 책임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이 일대는 한양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조선시대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놓인 수문이다. 다섯 칸(오간)의 수문으로 이뤄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이간수문(二間水門)은 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이다.
한양도성의 수문은 성곽 시설물로서 성 밖으로 하천수를 통과시키는 치수(治水)의 역할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어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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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장충동 구간 다산동에 위치한 암문 형태의 통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성곽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한양도성의 8개 암문(暗門)은 통문(通門)
한양도성을 순성하다보면 성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사람 키 높이의 암문(暗門)을 만나게 된다. 암문은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밀 출입구다. 암문은 원래 전쟁 시 은밀히 물자를 이동하거나 적이 성문을 봉쇄했을 때 비밀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통로이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암문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몇 개의 암문을 만들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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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 정상 인근의 암문(暗門)으로 불리는 이동 통로

현존하는 한양도성의 8개 암문은 대부분 성곽마을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의해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 무악동, 창의문과 백악마루 사이, 백악산 곡장아래, 성북동 북정마을, 낙산공원 정상, 낙산 이화동, 낙산 창신동, 장충동 구간 다산동에 8개의 암문이 위치하고 있다. 암문(暗門)보다는 사람이 편하게 왕래하는 ‘통문(通門)’으로 표현하는게 적절해 보인다.

낙산공원까지 5회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한양도성박물관에서 흥인지문과 오간수문 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 광희문, 장충동골목까지 순성(巡城) 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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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박물관 전시실 내부를 한 가족이 둘러보고 있다.

 -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에 인접한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과 인근 지역을 철거한 후 조성한 흥인지문 공원 위쪽,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에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2014년에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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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인 한양도성박물관에서는 방문객들에게 한양도성 600년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며 순성 정보를 제공한다. 9월 12일까지 ‘각자성석, 돌에 새긴 기록’ 기획전을 열고 있다. 관람시간은 10~18시(사전 예약 관람제로 운영), 관람료는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 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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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공원 초입 성벽에 모아놓은 ‘각자성석’/ 신희권 교수는 “각자성석은 성벽을 쌓은 시기에 따라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돌에 새겨진 기록은 조선시대의 각종 국가문헌기록과 내용이 일치한다"면서 "한양도성의 구간별 축성 시기와 함께 도성 관리의 철저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한다.

- 흥인지문공원 초입 ‘각자성석’
1·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흥인지문공원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며 길가 한양도성 성벽 아래 부분에 한자가 새겨진 성돌들이 눈에 띈다. 한양도성 축성의 역사가 담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다.
한양도성 성벽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 288개(2015년 기준)가 전해지고 있다. 한양도성은 1396년, 팔도에서 사대부와 천민을 제외한  양인 12만 명을 동원해  축성했다. 양인은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 공물(지역 특산품)을 바치고, 국가에 노동력(요역‧徭役)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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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주 디자이너

한양도성은 전국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18.6km를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쌓았다. 1개 구간은 600척(180m)이다. 자신들이 쌓았던 성이 무너지거나 훼손되면 돌에 새겨진 담당자를 불러 보수하도록 했다. 오늘 날 ‘공사 실명제’였던 셈이다. 취재에 동행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농한기를 이용해 98일이라는 깜짝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성을 쌓았지만 생각보다 튼튼했다”면서 “근면성실하면서도 지혜롭고 손재주 뛰어난 선조들이었기에 가능했던 대역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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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불리는 숭례문(崇禮門)과 비교해 건물의 규모나 형태가 유사하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천을 알아 볼 수 있다.
 
-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양도성은 궁궐을 비롯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고 단종 원년(1453)에 개축, 현재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흥인지문 현판에 용의 모양을 한 갈 ‘지(之)’를 넣은 것 역시 동대문 일대의 평평한 땅을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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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흥인지문 전경

고종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에 자주 다녔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고종 36년(1899) 5월,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단선 선로 전차를 개설했다. 이처럼 최초의 전차는 조선과 미국 전차회사와 공동투자로 이뤄졌다. 하지만 1907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던 성벽처리위원회(城壁處理委員會)는 동대문 홍예 안으로 운행하던 전차가 접촉사고가 잦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을 헐었다. 이때가 1908년 3월이다. 같은 해 9월에는 소의문 성벽을 철거하고 광희문과 혜화문의 성벽도 전찻길을 개설한다는 구실로 모두 헐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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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지세는 서고동저(西高東低)여서 군사적으로는 흥인지문(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흥인지문 바깥쪽으로 외적을 침입에 대비해 옹성을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보물1호’의 불편한 진실
사실 한양도성의 여러 문들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동대문과 남대문이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는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일제 철거론자들에 의해 숭례문과 흥인지문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1900년 초 당시 ‘한성신보’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는 철거에 반대했다. 하세가와 요세미치 사령관과 하야시 콘스케 일본공사를 찾아간 기타로는 “숭례문은 임진년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문이고 흥인지문으로는 고니시 유키나카가 입성한 일본 승전의 관문”이라며 보존의 가치를 주장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도로 확장 등의 이유로 속절없이 철거 되었다. 곱씹어야할 가슴아픈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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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수교 왼편 아래 모형으로 복원해 놓은 오간수문/
한양도성 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은 흥인지문(동대문)이 위치한 청계천 주변이었다. 도성 안의 물은 이곳으로 흘러들었고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건설했다. 하지만 1907년 일제는 청계천 물을 잘 흐르게 한다는 이유로 오간수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다.

 -  오간수문(五間水門) 터
내사산에 둘러싸인 한양은 북쪽과 남쪽에 비해 서쪽과 동쪽의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에 따라 각 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평탄한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질러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건설된 한양도성의 동쪽에 물길의 흐름을 관장하기 위한 두 개의 수문을 만든 이유이다.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치형의 오간수문은 성종 12년(1481년)까지만 해도 3개였으나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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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수문 자리에 일제는 오간수교를 만들었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오간수교 아래 옛 오간수교 사진과 영조가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바닥을 준설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어전준천제명첩 (1760년)》을 벽면 타일에 복사해 붙여 놓았다.

현재 동대문역 8번 출구에서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인 ‘오간수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왼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축소해 재현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오간수교 자리에 오간수문이 있었다. 없어진 오간수문 터(사적 제461호)
에 다리를 놓아 이곳을 오간수교라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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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과정에 발견된 오간수문의 기초 유구/
현재 복원과정에서 발굴된 석축들은 중랑구하수종말처리장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수표교와 함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개국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벌어진 오간수문이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제대로 원형을 살리지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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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한양도성과 동쪽 넓은 들판(성동원두城東原頭)에 일본 고시엔 경기장 크기만한 경성운동장이 들어섰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1925년 일제는 일본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해 성벽을 허물고 경성운동장을 짓고 일부 성벽으로는 관중석을 만들었다. 해방 후 동대문운동장과 서울운동장이란 이름으로 200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까지 82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시민들과 함께했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후 조성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개장보다 5년 앞서 2009년에 개장했다.공원 내에는 서울성곽과 이간수문 외에도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유구전시장,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벤트홀, 디자인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동대문운동장을 기념하기 위해 남긴 야간경기용 조명탑 2기와 성화대도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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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성곽을 허물어 1926년에 완성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도성을 허물고 지은 치욕의 시설이다. 이간수문은 그 자리에서 무려 87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혔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났다.

▷이간수문(二間水門)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남소문동천으로 모여든 물을 한양도성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어졌다. 1925년 경성운동장을 건설 당시 수문의 석재를 스탠드 기초석으로 사용하면서 훼손됐다. 이후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와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양호한 상태의 유구가 대량 발굴되면서 수문의 하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는 새로 쌓았다.
이간수문의 내측과 외측에는 각각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 형태의 석축시설이 있다. 수문 내측에는 세차게 흘러내린 물줄기가 두 수문으로 갈라져 들게 하는 뱃머리 모양의 물가름돌을 놓았다. 바닥에는 상부의 하중을 견디면서 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판상석을 정연하게 깔아 놓았다. 이간수문의 높이는 약 4m이며 폭은 3.3m, 길이는 7.4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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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수문 앞에서 문화재 발굴과 복원에 관해 설명하는 신희권 교수

2009년 10월에 이간수문과 치성 1개를 포함하여 발굴된 142m를 복원하고, 멸실된 123m는 돌을 쌓아 성곽이 지나간 자리임을 알렸다.
미니어처 같은 오간수문과 깔끔하게 복원된 이간수문을 바라보던 신희권 교수는 “문화유산 보존관리의 핵심은 원형유지다. 비록 발굴 당시 완전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면서 “이간수문이나 치성 유적의 복원에서 드러나 한계와 문제점을 거울삼아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근본적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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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사관 내부 전경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역사관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건립 공사 중 발굴된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2009년에 세워졌다.
11년 만인 2020년 8월, 상설 전시실을 전면 개편하여 재개관했다. 발굴 유물과 영상, 바닥에 새겨진 발굴 도면, AR체험 등을 통해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가려졌던 조선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역사관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유물 1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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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광장 내 유구전시장

 ▷유구전시장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유구들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건설하기 위해 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문화유산들로 한양도성 성곽, 조선 전기 관청 및 군사시설, 조선 중기 생산 시설, 후기 관청 터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훈련원 공원의 연못과 산책로 등 근대 조경시설도 발굴되었다.
어울림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유구는 야구장 부지 아래에서 찾은 조선 전기의 건물들 중 구조와 형태가 잘 남아있는 건물터와 석축시설, 담장기초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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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 발굴 현장 모형도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부지 아래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 도성방어를 위하여 건설된 관청 건물, 무기고, 집수시설, 우물 등의 유구들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옆 유구전시장1에서, 야구장 부지 아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하도감, 염초청 등의 건축 유구와 일제강점기 훈련원공원 조경시설은 갤러리문門 앞 유구전시장2에서 관람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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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기념관 내부 전경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은 지난 시간 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주변 모습을 돌아 볼 수 있는 추억의 공간이다. 동대문운동장은 1925년 일제에 의해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한때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2007년 철거되기 까지 82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시민들과 함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고교야구 열풍에 이어 1983년에는 프로축구 슈퍼리그가 여기서 시작됐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던 각종 체육대회와 행사 관련 사진, 운동장 관련 유물 그리고 운동장 주변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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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광희문 전경/
시구문(屍口門)·수구문(水口門)으로도 불렸던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이었다. 1960년대에 퇴계로 도로를 확장하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는 의미로 광희문이라 명명하였으나, 수구문(水口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고, 한양에서 시체가 도성 밖으로 나간다는 뜻으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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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屍口門) 밖 공동묘지 전경 (東宮殿下韓國行啓記念, 1907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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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성안(광희동)의 성곽마을 주민들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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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골목길 일부에서 축대로 쓰여진 성돌이 발견된다. 

- 장충동골목길
광희문에서 잠시 애도의 마음을 표한 후 성안의 여장을 따라 50여m나 걸었을까, 성곽길이 끊어지면서 갑자기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골목길을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서자 한양도성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다. 중간 중간 바닥에 동판으로 만든 ‘한양도성 단절구간 흔적표시’와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판으로 한양도성의 지나간 자리를 추측해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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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을 출발해 성안 광희동과 성밖 신당동, 성안 장충동과 성밖 신당동 및 다산동의 법정동 경계를 따라 장충동 주택가를 지나면 동호로에 이른다. 성곽의 대부분이 멸실되어 복원을 기다리는 구간이다.

드문드문 골목 안쪽 낡은 주택 아래나 좁은 골목길 축대의 일부 성돌이 순례객의 안타까움을 더할 뿐이다.
일본이 한국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동양척식회사는 조선도시경영연구소라는 회사를 만들어 신당동 일대와 조선의 국립 현충원인 장충단을 일대를 강제로 분양받아 매입한다. 신당동에는 보급형 문화주택을 짓고 장충동에는 석재를 사용해 수백 평이 넘는 고급형 문화저택을 지어 분양했다. 이 과정에서 성벽 대부분이 훼손되고 주택 아래로 묻혀버렸다. 해방 후 1960~70년대에 신축된 주택들 역시 성벽을 파괴하거나 담장 혹은 축대로 사용하였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장충동 초입의 故 이병철 회장 저택/
장충동은 성북동·평창동·한남동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촌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저택도 이곳에 있다. 부자촌에서부터 성곽유구는 사라진다. 대저택들이 성곽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장충동의 부자들이 강남으로 이사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명성은 빛을 잃었다.

장충동 골목길에서 만난 시민 김종구씨(59)는 “이 일대는 성돌 위에 집들이 들어서 있고, 재벌의 저택이나 신축 빌라 아래로 들어간 성곽은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다”라며, “장충구간의 성벽도 낙산구간처럼 시민들이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정비와 복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장충동 주택가의 시작점인 故 이병철 삼성회장의 저택 앞에 서자 동호로 길 건너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왠지 모를 반가움이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광희문에서 출발해 성곽이 멸실된 장충동골목길 구간을 벗어나면 동호로 길건너편, 복원된 한양도성이 다시 순례객을 맞는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6편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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