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밥상 엎는 가부장의 멸종

기사승인 2021-09-02 07: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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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밥상 엎는 가부장의 멸종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맞고 사는 아내는 돈이 없었을 것이다. 근현대 여성사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했던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말이다. 교수님이 젊었던 1970~1980년대에는 저녁마다 밥상이 엎어지고 수저가 날아가는 집이 많았다. 와장창 소리가 이웃집까지 울려퍼져도 동네 사람 모두들 ‘그 집 양반 또 저러네’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 집 아내는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제 저녁 엎어졌던 밥상에 새로운 식사를 차렸다. 한 명은 엎고, 한 명은 차리기를 반복하는 기묘한 듀오가 흔했다. 밥상 엎기가 손찌검으로 번지는 것도 그 시절 예삿일이었다. 

기묘한 듀오는 역할분담이 불공정해도 굳건히 유지됐다. 어떤 역할을 맡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당연히 엎는 쪽을 고를 거다. 엎으면서 짜증나는 직장 상사, 잘 풀리지 않는 업무, 연착된 지하철, 주변 사람들의 잔소리로 누적된 그 날의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릴 거다. 배가 고플 수 있으니까 배는 적당히 채운 시점에서 엎어야지. 그러면 차리는 쪽은 뒷일을 수습하고, 밥상은 엎기 전처럼 완벽한 상태로 무한리필 된다. 누가 봐도 차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손해다. 그런데도 차리는 쪽은 듀오 해체 선언을 하지 않는다.

차리는 쪽은 돈이 없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남편을 떠난 전업주부가 직장에 취업해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려면 쉽지 않은 여정을 거쳐야 한다. 자녀의 유무와 남편에 대한 감정을 차치해도, 밥상이 엎어지는 꼴을 참지 않고 뛰쳐 나가면 본인이 당장 밥을 굶게 된다. 그래서 아내들은 차리는 쪽을 맡아 가정을 유지한 것이다. 아내가 가정이 해체돼도 혼자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있었다면, 남편도 기분이 내키는 대로 밥상을 엎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아내를 둔 남편은 밥상을 엎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다. 2021년도에 밥상 엎는 남편이 멸종에 가까울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존재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 경제력이 여성의 생존부터 삶의 질까지 좌우한다. 특히나 기혼 여성의 경제적 종속은 여성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지 못하는 족쇄가 된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는 자신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피해자를 본인과 대등한 인격체로 배려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과태료 처분을 받을까 두려워 피해자가 가정폭력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진술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가해자가 과태료로 100만원을 납부하면, 피해자는 가계부에 -100만원을 기록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 취업자가 증가하고, 맞벌이 부부가 흔해졌다고 해도 능사가 아니다. 여전히 근로자의 임금은 성별에 따라 격차가 벌어진다. 국내 상장기업 2149곳의 근로자 1인당 평균 연봉은 지난해 기준 남성이 7980만원, 여성이 5110만원이다. 기혼 여성의 경력단절 현상도 뚜렷하다. 30대를 기점으로 이후 연령대에서 남성 근로자의 수는 유지되는 반면, 여성 근로자의 수는 현저히 감소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상담한 가정폭력 사례는 2019년 1만4775건에서 지난해 1만5755건으로 늘었다. 이 기간 전체 내담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2019년 92.4%, 지난해 94.6%로 집계됐다.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돈을 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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