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재 사망, 50년 전 영국 수준

법적 책임도 낮아…법 위반한 5114건 중 29건만 실형

기사승인 2021-09-17 06:00:21
- + 인쇄
우리나라 산재 사망, 50년 전 영국 수준
연합뉴스

[쿠키뉴스] 노상우 기자 = 한국의 지난해 산재 사망자는 882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50년 전 1970년대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고를 계기로 1000명대 수준이던 산재 사고 사망자를 임기 내인 2022년까지 500명대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목표로 산재예방사업을 강화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안전분야 인력 충원과 시설투자 확대, 모든 공공기관의 안전관리 기본계획 수립, 산재 위험이 높은 기관은 ‘안전관리 중점기관’으로 선정해 매년 산재 감축 목표 설정 및 관리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산재 감축이 아닌 산재 사망자 축소를 목표로 한 것은 산재 은폐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1000명대를 기록하던 산재 사망자는 2019년 885명, 2020년 882명으로 다소 감소했지만, 큰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 또 ‘산재사고 사망자’ 통계에는 산재보험에 신청해 승인된 사람만 집계된다. 어업인, 공무원, 군인 등은 제외돼 사실상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장은 “1970년대 영국의 산재 사고 사망자는 985명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산재 보험제도로 보장되는 이들만 통계에 집계되는데도 882명이다. 우리나라가 50년 전 영국보다 나은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라고 밝혔다. 

중대 사고는 한순간에 발생하지 않는다. 치명적이지 않은 사고가 쌓임에도 관리되지 않게 됐을 때 재해로 다가온다. 한국의 산재 발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이하지만 산재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세계 최고 수준을 차지한다. 산재 대부분이 알려지지 않고 숨겨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정우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이 지난 2월 발표한 논문 ‘노동조합은 산업재해 발생과 은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서는 산재 은폐 비율이 66.6%로 집계되기도 했다. 

영국은 1970년대 초반 안전보건 문제를 조사하는 로벤스 위원회를 만들어 안전조직 시스템 개선, 경영진의 주도적 책임성 강화, 노동자 참여 강화를 안전보건 관리의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는 ‘로벤스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하고 산업안전보건청을 설립, 일터에 있는 모든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해 발생 가능성과 중대성을 추정하는 위험성 평가를 도입했다. 이후 영국은 산재 예방과 노동 안전보건 모범국가로 인정받게 됐다.

국내 산재사망사고를 보면 대부분이 추락, 끼임, 부딪힘 등 이른바 ‘재래형 산재’라고 불리는 사고들이다. 기본적인 방호설비, 안전조치로 예방할 수 있지만, 계속 반복되는 경향을 보인다. 위험관리와 교차점검 모두 진행돼야 하는데 관리 주체가 달라 어이없는 죽음이 연이어 발생한다. 특히 소규모 사업장에서의 위험이 더 크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법·제도적으로 안전보건관리를 위한 체계가 구성돼 있다. 소규모사업장은 안전보건관리체제 구성의무가 없다. 위험 자체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재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도 현저히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법원 및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1만1766명, 총 재해자수는 59만559명이다. 같은 기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건수는 5114건이었지만, 벌금형이 3176건, 집행유예가 728건이었다.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는 29건으로 산재 사망자 대비 0.2%, 기소 대비 0.5% 수준에 불과했다.

장 의원은 “6년간 1만2000명이 일하다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고, 죽지 않고 퇴근할 수 잇는 권리는 대한민국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노동자권리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인 박다혜 변호사는 “법에 규정된 안전규칙을 위반해도 실형으로 책임 받는 사람이 적다”며 “산재 사망자가 발생해도 500만원 내외의 벌금형을 받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내년 1월부터 중대산업재해에 대해 사업주, 경영책임자, 법인을 처벌할 수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다. 근로자를 포함한 종사자와 시민의 안전권을 확보해 기업의 조직문화 또는 안전관리 시스템 미비로 인해 일어나는 중대재해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다만, 추상적인 표현이 많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져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질 수 없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류 센터장은 “책임 없이 위험을 통해 이윤을 얻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며 “노동자가 위험하면 기업도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기업이나 생산성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기관은 있지만, 노동자 안전과 건강에 대한 배타적 옹호기관이 부재하다. 정부가 제대로 역할하지 않으면 산재 사망을 줄일 수 없다. 새로운 안전보건 행정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nswreal@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