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맘바’에 맞서는 나, ‘나이비스’를 사랑하는 우리 [광야의 딸 에스파①]

이준범 / 기사승인 : 2021-10-16 06: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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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위기에 빠진 날 지켜준 건 너였어”라고 시작되는 달콤한 노래는 그룹 에스파의 신곡 ‘새비지’(Savage)에서 가장 이질적인 구간이다.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Don't you know I'm a Savage?)라는 경고로 시작하는 ‘새비지’는 에스파 세계관에서 절대적 룰을 어기고 광야를 떠도는 빌런 블랙맘바와 본격 맞대결을 그린 곡이다. 이전 곡인 ‘넥스트 레벨’에서 “널 파괴하고 말 거야”라고 맞대결을 예고한 에스파는 ‘새비지’ 뮤직비디오 도입부부터 블랙맘바와 함께 등장해 “더는 두고 볼 수 없어”라며 행동에 나선다. 블랙맘바가 빠뜨린 환각 퀘스트부터 각자의 무기로 블랙맘바의 눈을 깨뜨리는 장면까지, ‘새비지’의 음악과 분위기는 전개되는 이야기 시퀀스에 따라 여러 번 변주된다. 이전보다 한층 더 어둡고 진지하고 무거운 톤이다. 에스파의 조력자인 나이비스(nævis)를 호명하는 구절이 나오기 전까진 그렇다.

지난해 11월 데뷔 후 약 1년 동안 싱글 세 곡이 전부였던 에스파는 미니앨범 ‘새비지’로 신곡 여섯 곡을 추가했다. 동명의 타이틀곡 ‘새비지’를 제외한 다섯 개의 신곡은 에스파 세계관을 확장하고 보완해준다. ‘블랙맘바’-‘넥스트 레벨’-‘새비지’로 이어지는 SMP 타이틀곡이 이야기의 메인 플롯이라면, 수록곡은 일종의 서브 플롯이다.

일부 신곡은 그동안 에스파가 보여준 강하고 쿨한 모습의 연장선이다. ‘아이너지’(ænergy)에선 “매섭지? 따끔하지? 여왕벌(Queen bee) 난 포식자”라며 강한 모습을 과시하고, 처음으로 멤버 각자가 지닌 능력을 소개한다. ‘아일 메이크 유 크라이’(I’ll Make You Cry)에선 “뼛속까지 넌 아파봐야 돼”라며 “누가 널 구해 아무도 못 구한대. 쫓겨난 너를 보면서 웃지”라며 배신당한 상대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이 세계와 나를 괴롭히는 명확한 적이 눈앞에서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나머지 세 곡은 조금 다르다. 그동안 빌런과 대결하며 강한 면만 보여줬던 에스파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어디서나 주인공”이고 “월화수목금토일 난 너무나 예뻐서 바빠”라며 행복을 위한 자아도취에 빠진 ‘예삐 예삐’(YEPPI YEPPI)를 제외하면, 지난 겨울 발표한 ‘포에버’(Forever)처럼 서정적인 고백송이 담겼다. ‘아이코닉’(ICONIC)에선 “본능에 널 맡겨봐”, “네 심장은 내게만 반응해”라며 좋아하는 상대에게 말을 건네고, 6번 트랙 ‘자각몽’에선 “어둠 속에 길 잃은 밤처럼 홀린 듯이 헤맸어”, “사라진대도 놓지 않을게 널”이라며 이미 떠난 사랑을 붙잡으려 몸부림친다.

‘새비지’에도 사랑을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의 나이비스. 우린 널 사랑해”(My nævis we love U)라고 애정의 대상을 명확하게 지목한다. 사랑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우리’다. ‘넥스트 레벨’에서도 “나이비스 우리 아이(æ)들을 불러봐”라고 ‘우리’가 등장했다. 이는 그동안 에스파가 각 노래 도입부에서 “난 중독됐어”(I'm addicted, ‘블랙 맘바’), “난 다음 레벨에 있어”(I'm on the Next Level, ‘넥스트 레벨’), “난 멋있어”(I'm a Savage, ‘새비지’)라며 ‘나’를 호명했던 것과 다르다.

에스파는 악에 맞서는 건 ‘나’고, 사랑하는 건 ‘우리’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문제를 발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건 ‘나’라는 개인의 마음과 행동에서 시작하고, 무언가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건 ‘우리’ 모두가 함께 연대해야 가능하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에스파가 사랑을 고백한 조력자 나이비스는 어떤 존재를 상징하는 걸까. ‘더 강해진, 야수 같은’ 아이돌 에스파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