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 성희롱, 비정규직 피해자는 더 막막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근절대책 마련 위한 토론회’
673명 중 130명 “성희롱 피해 이후 직장 그만 둔 동료 있다”
조직문화 개선·성희롱 사건 대응 체계 신뢰도 제고해야

기사승인 2021-11-03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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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문 성희롱, 비정규직 피해자는 더 막막하다
쿠키뉴스 DB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가 조직 내 성희롱에 취약한 위치에 남겨졌다. 국회, 지자체, 군대에서 여성 근로자에 대한 성범죄 문제가 불거지면서 공공부문 성폭력·성희롱 근절이 정부의 최대 과제로 떠올랐지만, 비정규직 여성은 유독 조명되지 못했다. 이들을 위한 구제·보호 수단도 부족한 실정이다.

2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근절과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도 보호 대상으로 포괄할 수 있는 공공부문 성희롱 근절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토론회는 전국여성노동조합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공동으로 주관했다.

심선희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에 따르면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의 성희롱 피해는 최근 3년간 빈번했다. 심 연구위원이 공공부문(학교, 고용노동부)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 673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직장에서 가슴·엉덩이 등 특정 신체 부위를 쳐다보는 행위를 경험한 응답자는 63명(9.4%)에 달했다.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를 당한 응답자도 59명(8.8%)으로 적지 않았다. 52명(7.7%)이 회식이나 회의·모임 등에서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하는 행위를 경험했다. 34명(5.1%)은 성적인 농담이나 욕설을 들었다.

2차 피해도 심각했다. 피해자가 부정적 소문에 시달리다가 직장을 떠나는 실정이다. 응답자 가운데 30명(4.5%)은 부정적 소문이 직장 내에서 확산하거나, 동료와 상사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는 등의 2차 피해를 경험했다. 직장 상사로부터 퇴사를 권유받은 피해자도 29명(4.3%) 있었다. 성희롱 피해 이후 직장을 그만 둔 동료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30명(16.3%)이나 됐다.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동료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아, 동료의 피해사실이 조직 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건을 목격한 응답자도 100명(14.9%)에 달했다.

‘신분’의 차이가 비정규직 근로자의 취약점을 키웠다. 고용안정성이 낮은 위치인 만큼, 성희롱을 참고 견디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연구에서 수집한 사례 가운데 학교에서 근무한 피해자 A씨는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교장에게 “언제 결혼 할거냐”, “어떻게 (성생활을) 참냐”는 등의 불쾌한 질문을 들었다. 하지만 A씨는 곧바로 항의하지 않고 교장을 무사히 들여보낸 후, 며칠 뒤 사건을 신고했다. 신고된 사건이 흐지부지된 사례도 있다. 학교에서 근무한 피해자 B씨는 노래방에서 교육청 행정직원에게 성적으로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B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경험을 토로했고, 사건을 인지한 교장이 교육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B씨는 가해자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교육청 차원의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으나, 별 다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피해자들은 회유와 무마에 부딪혔다. 성희롱 피해를 신고하고 고충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다수의 피해자들이 “처음인데 용서해 줄 수 있지 않냐”, “사이가 좋아서 그렇게 얘기 했을 수 있다”,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인다” 등의 발언을 들은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 구제와 회복 보다 조직의 명예가 더 중요한 가치로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인 피해자보다, 정규직 관리자인 가해자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도 문제다.
공공부문 성희롱, 비정규직 피해자는 더 막막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근절과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캡처.
사건 처리 원칙에 대한 신뢰도와 민주적 의사소통 문화가 중요한 요소로 꼽혔다. 심 연구위원은 “조직 내에서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경험을 하면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더욱 어려우며, 회사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 수 있다”며 “조직이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건 재발을 막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평등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것은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며 “성차별적인 조직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로를 규제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속적인 실태 파악과 피해자 보호 인프라 구축이 남은 과제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장은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고용상 불이익 등에 더 민감하고, 문제 제기 차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현재 여성가족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성희롱 실태조사는 공공부문과 민간기업의 전체적인 성희롱 실태를 파악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우려했다. 이어 “성희롱으로 인해 피해자가 위협받을 때, 피해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작업중지권’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 회장은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제41조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조항은 작업중지 상황을 ‘고객의 폭언 등’으로 한정하고 있어, 성희롱 피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노동자로서의 안전하고 평등한 노동환경을 보장받는 데 있어 차별적인 대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특히 공공기관은 성범죄, 성희롱 관련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행하고 선도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여성인 사례가 많다”며 “이는 성희롱 발언, 외모평가, 소문내기 등이 가해 행위임을 인지하고 시정하려는 조직문화가 매우 부족하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정부의 정책·법률보다 개별 조직의 변화가 긴요한 사항으로 강조됐다. 박 연구원은 “성희롱의 유형과 양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국가 행정력과 사법의 과도한 개입은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조직문화 개선이 선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을 키울 위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노동조합, 회사 내규 등 조직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합한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원아 고용노동부 여성고용정책과 서기관은 “성희롱은 개인적 일탈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직장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데 크게 동의한다”며 “개별사건 처리뿐 아니라 사업장 조직문화 진단도 적극 시행해 사업장의 변화를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사내 성희롱 조사 및 심의과정에서 객관성을 담보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제언에 공감하며, 사업장에서 반영 가능한 지침을 마련하도록 고용노동부에서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박 서기관은 “조직 내 성희롱 예방 및 대응에 노동조합이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여성노조의 대응 체계와 노하우가 축적, 공유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임수연 여성가족부 권익침해방지과 사무관은 “7월 성폭력방지법이 개정되면서 피해자의 명시적인 반대의견이 없으면 공공기관장은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파악한 직후 이를 여성가족부장관에게 통보해야 한다”며 “여성가족부가 신속히 조직의 문제상황을 파악하고, 개선사항을 전달해 재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임 사무관은 “2차 가해를 범한 공무원에 대한 징계 기준과 2차 피해 예방 지침 및 책임 소재도 법률 개정을 통해 보다 명확해졌다”며 “공공부문에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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