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후광 벗고 시대 아픔 조명한 뮤지컬 ‘모래시계’ [쿡리뷰]

기사승인 2022-06-23 06: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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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후광 벗고 시대 아픔 조명한 뮤지컬 ‘모래시계’ [쿡리뷰]
뮤지컬 ‘모래시계’에서 태수를 연기하는 배우 조형균.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모래시계 속 작은 모래알들은 일견 무력하다. 중력에 따라 그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충분한 모래가 쌓이면 중력을 뒤집을 기회가 온다.

지난달 26일 서울 신도림동 대성 디큐브 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모래시계’는 모래알 같은 개개인이 시대의 격랑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보도지침, 슬롯머신 비리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부끄러움을 딛고 시대를 바꾸려 한 청춘들을 조명한다.

‘모래시계’는 1995년 SBS에서 방영된 동명의 인기 드라마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2017년 처음 공연된 후 5년 만에 돌아왔다. 리메이크지만 신작 같고, 재연이지만 초연 같다. 원작이 가진 아우라를 의도적으로 벗어난 데다,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과 이야기를 대폭 수정한 결과다.

주인공 태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린 탓에 꿈이 좌절된다. 절친한 친구인 우석은 검사를 꿈꾸지만 집이 가난해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다.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혜린은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이들은 시대에 떠밀려 자신이 바라지 않은 길을 걷는다. 삶은 늘 부끄럽다.

원작 후광 벗고 시대 아픔 조명한 뮤지컬 ‘모래시계’ [쿡리뷰]
‘모래시계’에서 혜린을 연기하는 배우 유리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주인공들은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선택이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 다시 만날 때 우리 서로가 싸워낸 시간들을 안아줄 수 있기를”이라는 노랫말처럼, 중력을 거슬러 자기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한다. 음악은 장엄하지만 가사는 시적이다. 시간을 뛰어넘어 신념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같은 원작 드라마의 명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했던 혜린의 경호원 재희 캐릭터도 사라졌다. 대신 혜린이 하숙하던 집 딸이자 사회부 기자인 영진의 비중을 키웠다. 영진은 우석의 실종과 슬롯머신 비리 등 주요 사건을 파헤칠 뿐 아니라, 이를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 덕분에 작품 속 이야기는 단절된 과거로 남지 않고 현재로 이어질 동력을 얻는다. 남성 중심적이던 원작과 달리 여성 캐릭터들 활약이 커진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최민수가 연기한 원작 속 태수가 마초적인 인물이라면, 조형균은 그를 한층 온순하고 연약하게 해석했다. 태수가 비리 정치인과 손잡는 동기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감정을 흔드는 노래로 빈칸을 채운다. 혜린 역할로 무대에 오른 뮤지컬 배우 유리아는 캐릭터가 가진 강인한 성품을 호소력 있게 표현한다. 주연 배우들 중 유일하게 초연에 참여했던 최재웅은 우석 역을 맡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공연은 오는 8월14일까지 이어진다. 다만 21일 공연팀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26일까지 잠시 쉬어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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