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으로] “사고는 그렇게 나더라고요”

기사승인 2017-05-29 09: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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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이영수 기자]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사고나 질병으로 척수가 손상된, 그래서 휠체어를 타게 된 사람입니다. 어려운 수술과 힘겨운 재활, 그리고 긴 터널 같던 실의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직업과 일상 그리고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한숨을 돌리고 뒤돌아보니 아직 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이 있네요.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당신이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척수장애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가 발견한 희망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다 교통사고, 낙상, 의료사고, 질병 등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중증장애인이 된 이들에게 가족, 친구, 직업은 어떤 의미인지, 삶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소중한 가치들은 무엇인지 장애를 딛고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고 계신 12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주 서부재활체육센터 헬스트레이너 조호석 씨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캘리그라피로 꿈을 찾은 이은희 씨를 소개합니다.

하필 무너져 가던 담벼락이 제 허리로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거기에 대해 모색하는 인턴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제가 대학원 심리학과를 다닐 때 실습을 해야 했는데 우리 지역 장애인복지관에서조차 저를 실습생으로 받아주지 않고 외면하더라고요. 그때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실질적인 장애인 고용을 위해 그에 따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인턴십 과정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사고는 그렇게 나더라고요. 하필 무너져 가던 담벼락이 제 허리로 떨어진 거예요. 옆에서 수다를 떨던 친구들이 ‘괜찮아?’ 얼굴이 파래지길래 ‘나 좀 심각한 것 같아. 택시 말고 119 불러줘” 그랬다니까요. 담벼락에 깔려서 다쳤다고 하면 남들이 웃어요.”

1992년 원광대 서예학과를 다니던 이은희 씨는 병원에 실려 갔다. 보상금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건물주는 치료비 일부만 보태주었습니다. 수술 후 상처가 아물 때까지 병원에 1년을 머물렀죠. 수술한 부위가 안 좋아서 8번이나 수술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방광염 같은 후유증이 잇따라 5년 동안 일 년에 한 번씩 재입원을 거듭하면서 그렇게 은희 씨는 이십 대를 보냈습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재수술 기간이 너무 길어서 빨리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나가고 싶었어요. 주변에 다시 공부를 하거나 직업을 갖게 된 장애인 롤 모델이 없어서 저는 여행을 통해서 재활과정을 거쳐 왔던 것 같아요. 휠체어 타는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은희 씨는 숱한 물음표를 안고 집을 떠나 삼육직업재활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사실은 미국에 가서 공부를 좀 하고 싶었는데 미국 비자가 안 나와 그래서 캐나다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무작정 캐나다로

“무작정 캐나다로 갔어요.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은 도대체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사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나는 무얼 해야 행복할까 그런 고민을 되게 많이 했을 때였죠. 4개월 동안 여행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이러면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귀국해 나사렛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어요.”

장애를 얻고 나니 사회복지 쪽의 관심이 커진 탓이었습니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되어있지 않은 모교의 학내 시설 역시 진로 방향을 달리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은희 씨는 이후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대학원 때,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이라고 그곳 국장님이 러브콜을 하신 거예요. 나사렛대가 천안에 있는데 천안에도 선교나 친목 모임이 아닌 여성장애인 리더를 키우는 일을 해 보자 해서 간사로 가게 되었죠.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 키우는 일에 집중해야겠더라고요.”

예기치 않은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은희 씨는 엄마가 된다는 건 신비로운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육아 공백기도 있었지만 나사렛대 안에 ‘장애학생 자립생활 지원센터’가 생기면서 운영해 달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죠. 그러던 차에 아이가 커나가면서 예기치 않은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그녀가 서예를 전공했다는 걸 알게 된 아이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이죠. 은희 씨는 방과 후 교실에서 틈틈이 서예와 미술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타이밍이 절묘했던 것이죠. 그 일이 은희 씨를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동안 인쇄물 홍수 속에서 손 글씨 보는 일이 어려운 적이 있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미적 감각을 더한 글자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답니다. 평생교육원이나 방과 후 교실 강좌도 많이 개설되었죠.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 은희 씨는 캘리그래피 전문 작가 겸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장애인창의문화예술연대 ‘잇다’의 대표로 뮤지컬, 전시, 영상제작 등의 기획과 공연사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특성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우선되어야

“아내가 돈을 벌면 뭔가 남편하고 동등한 관계가 되잖아요. 가계생활에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필요한 일이었고, 공부해뒀던 게 아깝기도 해서 재취업하게 되었어요. 더군다나 아이가 자라니까 엄마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장애인이 취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애인 특성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장애특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충돌이 생기더라고요. 저희 엄마 아빠만 해도 제 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셔요. 아파도 안 아픈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하니까요. 어머니가 한 번씩 저희 집 냉장고를 정리해 주시는데 제 손이 닿지 않는 곳 저 꼭대기에 물건을 올려놓아요. 20년이 지났어도 제 상황을 잘 모르시는 거죠. 그래서 제가 다큐 같은 걸 찍어서 저희들의 이런저런 깊숙한 고민을 알리는 일을 하려고 해요.” juny@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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