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신건강이다] 국내 사회문화적 특성 고려한 정신보건 R&D 지원 필요

기사승인 2017-06-26 08: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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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신건강이다] 국내 사회문화적 특성 고려한 정신보건 R&D 지원 필요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마음의 병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날 만큼 정신건강 문제는 사회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정신과적 질환은 전체 질병 보유기간이 인생의 22.9%로 단일 질환 중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나 개인의 의료 부담이 클 뿐 아니라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야기한다.

선진국은 이미 정신건강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유망 과학기술로 지정하여 적극적인 R&D 투자를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정신건강 예산으로 미래 대응을 위한 적극적 R&D 지원 또한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정신보건 R&D 투자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혹자는 선진국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니 그 결과물을 가져다가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보건 분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국가 별 상황과 문화를 고려한 특화된 연구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은 세계적으로 유사한 진단명으로 불려지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증상을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사회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들은 ‘기분이 우울하다’는 표현보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과 같은 신체증상을 더 많이 호소한다는 연구보고들이 있다. 즉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증상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아직까지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평가도구의 경우 외국척도를 번역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듯 각 나라별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진단도구를 개발해 내야 질병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정신건강 문제는 생물학적 요인과 정신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유전적 특성 등 생물학적 요인도 인종 별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보다 많은 편차를 보이는 것이 사회적 요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노인인구는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은데 신체질환, 독거, 저소득 등이 국내 노인자살의 주요 위험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노인자살 예방대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선진국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우리나라 의료 및 복지서비스 정책, 노인부양 문화 등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보건기구 (WHO)는 모든 국가가 그 특성에 맞는 국가차원의 자살예방 전략을 세우기를 촉구하고 있다.

셋째, 정신보건서비스 체계에 대한 연구결과를 적용할 때에도 국가별 의료시스템과 인프라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선진국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면 현실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가 주도의 지역사회 관리 모델이 중증정신질환자의 예후를 좋게 한다는 외국 연구결과를 국내에 적용하려면 먼저 국내의 상황을 고려한 비용-효과 추계 연구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넷째, 정신건강 문제는 조현병, 우울증, 조울증 등 정신질환뿐 아니라 스트레스, 재난, 위기상황에서의 적응 문제와 같은 넓은 범주를 포함하는데 몇몇 영역은 사회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특수성 등으로 외국 선행연구가 전무하다. 예를 들어 자연재해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국가에서 재난 정신건강 분야의 연구는 ‘자연재해’ 위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결과를 세월호 사건과 같은 특수한 재난 시의 심리적 개입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유럽에 여러 난민 연구 결과가 있다고는 하나, 그 결과를 북한 이탈주민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 영국, 호주 등 선진국 사례를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정신보건 연구개발계획을 설계할 필요성이 있다. 해외 선례 및 WHO 권고사항을 참고하여 정신보건 예산확보와 R&D 투자를 통한 대한민국 현실에 최적화된 정책 개발이 절실한 시점이다.

글·박수빈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연구소 연구기획과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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