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기사승인 2017-08-0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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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 일본 교토=정진용, 이소연, 박태현 기자] #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그 바다에서 죽었다” 

이철우(93)씨는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72년 전의 일이었다. 충남 천안 출신인 그는 지난 1944년 일본 오미나토(大湊)항으로 강제동원됐다. 하역작업은 고됐다. 임금은커녕 음식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늘 배가 고팠다. 헌병대의 감시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노역에 시름 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고향에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배에 올랐다. 배 안은 여자, 아이들을 포함해 조선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옆 사람과 몸을 부딪히기 일쑤였다. 배에 탔던 사람의 수가 족히 8000명은 넘어 보였다.  

출항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선원들은 “물이 떨어졌다” “기름을 보충해야 한다” 등의 말을 하며 배를 한적한 곳에 정박했다. 오후 5시쯤이었을까.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두 동강 났다. 사람들은 난간과 돛대 등을 붙잡고 ‘인간띠’를 만들며 버텼다. 맨 윗사람이 손을 놓치자 함께 매달려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돛대에 매달렸던 이씨는 이를 악물고 버틴 끝에 민간 어선에 구조됐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배가 조각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함께 탔던 동료들의 유해 역시 수습되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 정부 모두 참사를 외면했다. 담담히 말을 이어오던 이씨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일본 아오모리(靑森)현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우키시마(浮島)호는 지난 45년 8월24일 교토(京都)부 마이즈루(舞鶴)만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씨와 같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1000여 명으로 추정되던 우키시마호 생존자 중 연락이 가능, 흐릿하게나마 증언을 할 수 있는 이는 현재 이씨가 유일하다. 

▲부산 바라보며 외로이 세워진 추모비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5월24일 마이즈루만을 찾았다. 이씨가 ‘쳐다보기도 싫은 지긋지긋한 장소’라고 말했던 우키시마호 참사 현장이다. 배는 마이즈루만 내 작은 무인도인 뱀섬(蛇島) 인근에서 침몰했다. 마이즈루시 끝자락인 시모사바카 마을 인근의 한 공터. 침몰 현장에서 300m 남짓 떨어진 곳에 ‘우키시마호 순난(殉難·재난을 당함)자의 비(순난비)’가 외로이 서 있다. 한복을 입은 여성과 아이, 절규하는 남성의 모습이다. 여성의 시선은 그들이 도착해야 했던 한국의 부산을 향하고 있다. 

순난비는 지난 78년 마이즈루 시민단체의 손으로 세워졌다. 요에 카츠히코(76)씨는 순난비를 직접 제작, 약 40년간 우키시마호 추모 활동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는 현재 ‘우키시마호 순난자를 추도하는 모임(추도 모임)’의 의장이기도 하다. 추도 모임은 순난비 건립 당시 우키시마호 참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함께 세웠다. 안내판에는 ‘전쟁만 아니었다면, 식민지 지배와 강제연행만 없었다면 이 같은 비참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요에씨는 주름진 손으로 안내판에 묻은 얼룩을 쓱쓱 닦아냈다.    

순난비 뒤편에는 흑백 사진이 걸려있다. 가라앉은 우키시마호와 소련에서 귀환병을 싣고 돌아온 고우안(興安)호의 모습이다. 고(故) 미우라 히데오씨가 지난 54년 찍은 이 사진에는 고향에 돌아간 자와 돌아가지 못한 자의 대비가 녹아있다. 일본 패망 후, 러시아와 남양군도 등 각지에 파병됐던 일본 군인들은 군항이었던 마이즈루만에 입항,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옥도’로 마이즈루를 기억하는 이씨와 달리, 일본인들은 마이즈루를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으로 인식했다.  

▲ 점점 고령화되는 추도모임…시 박물관에는 ‘달랑 한 줄’

요에씨는 매년 8월24일 우키시마호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회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추도 모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병환, 노환 등으로 인해 추도회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이 점차 줄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해당 모임은 요에씨의 일인 다역으로 유지되고 있다. 

요에씨는 “함께 모임을 진행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거나 요양원에 있다”며 “추도회를 진행하기 힘드니 이제 끝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후임자를 열심히 물색 중”이라며 “우키시마호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기억은 계속돼야 한다. 그만둘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시민단체의 고군분투에도 불구, 마이즈루시에서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를 소개하는 관광 책자에는 순난비의 위치가 점으로만 표시돼 있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순난비가 세워졌는지에 대한 소개는 찾아볼 수 없다. 시청 내 위치한 시 박물관에도 ‘마이즈루만 앞바다에서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다’는 단 한 줄의 내용으로만 참사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시는 군항으로서의 역사는 상세히 기록, 전시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 일본 해군의 병기고 역할을 했던 시세이기념관, 구 해군기념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온 귀환자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마이즈루 귀환기념관과 귀환기념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참사 원인·피해 규모도 모르는 정부…민간단체만 고군분투

그간 한국 정부는 우키시마호 참사를 외면해왔다. 제대로 된 조사, 유골 수습 등은 진행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의 원인을 ‘미국 기뢰에 의한 폭발’로 발표했다. 총 승선 인원은 3725명. 이 중 사망자 수는 524명으로 집계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다수의 생존자는 배에 7000명에서 1만2000명까지 승선했다고 회고했다. 침몰의 원인은 기뢰가 아닌 배 내부에서 발생한 폭발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부 생존자는 “침몰 직전, 일본 선원들은 배를 탈출했다. 조선인들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05년에야 진상조사를 진행, ‘귀국선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에 관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러나 해당 보고서에서는 일본 정부의 발표가 부정확하다는 사실 외에는 뚜렷한 결론이 담기지 못했다. 폭발 원인이나 사망자 수는 여전히 미궁에 싸여 있다. 

정부의 침묵이 이어지자 유가족이 나섰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는 지난 2015년 마이즈루만을 방문, 유해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70년간 쌓인 퇴적층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생존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도 민간의 몫이었다. 전재진 우키시마호진상규명협회 회장은 지난 92년 일본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우키시마호 참사를 접했다. 이후 지난 93년부터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다. 강제동원 경위, 노동 실태, 우키시마호 침몰 당시 상황 등이 담긴 개인 기록부와 증언집을 제작했다. 총 82명의 증언이 담겼다. 정부의 지원은 없었다. 모두 사비를 들여 진행된 일이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진상규명에 손을 놓은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참사 직후 일본 정부의 조사가 굉장히 엉터리로 진행됐다”며 “일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에 생존자의 이름이 기재된 사례도 있다. 몇 명이 희생됐는지 현재까지도 전혀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생존자들은 한결같이 배가 V자로 쪼개졌다고 증언했다”며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면 이와는 반대 방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상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우키시마호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45년 8월15일 이전 피해자에 대해서만 보상금을 지급했다. 광복 후, 9일이 지나 사망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희생자에게 2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 사라져 가는 참사의 증인들…“내가 죽기 전에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우키시마호 참사를 증언할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시모사바카 마을에서 우키시마호 구조 작업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사람들은 사망 또는 노환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다. 생존자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배에 탑승했던 이들은 대다수 20대 이상이었다. 살아있다면 90세가 훌쩍 넘었을 나잇대다. 지난 6월 충남 아산의 자택에서 쿠키뉴스 취재팀과 만난 우키시마호 생존자 이씨는 “당시 배에 탔던 사람 중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어렸다”고 이야기했다. 부모를 따라 배에 올랐던 어린아이들은 참사 당시 대부분 사망했다. 그는 “생존자 중 함께 진상규명 활동을 했던 이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다”며 “‘나 또한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탄식했다. 

이씨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지난 2003년 평양에서 우키시마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과 북한, 일본 3국의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씨 역시 참석해 증언하려 했으나 출발 직전 무산됐다. 이씨는 “천안역에서 공항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통일부에서 출국 당일 ‘비행기표 값을 나중에 주겠다’며 예산 지급을 미뤘다. 또 다른 생존자였던 고(故) 정기영씨, 전 회장과 얼싸안고 울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이야기했다.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들은 지난 2012년부터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다. 한영용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장은 “일본에서 유품, 유골 등을 찾아 추모 공원을 만들어 모셔놓고 제대로 된 추모제를 지내고 싶다”며 “정부에서 빨리 나서서 이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 정부 “우키시마호 진상조사 마무리됐다…향후 계획 없어”

정부는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진상 조사가 완료됐다는 입장이다. 강제동원 피해를 조사하던 위원회는 2015년 문을 닫았다. 위원회의 업무는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업무지원단(지원단)으로 이관됐으나,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추가 조사는 계획돼 있지 않다.  

마이즈루만 아래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 유골 봉환 역시 요원하다. 지원단 관계자는 “(유골 봉환은) 일본 측과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관련 예산은 잡혀있으나 일본과의 협상이 재개되지 않았다. 지금 현재로서는 해당 사업에 대해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유골 봉환 문제는 국내 유족과 대일외교, 행정차지부의 도움 등이 다각적으로 조율돼야 해결 가능하다”면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봉환에 대한 관심과 계획을 늘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키시마호에 대한 정부의 종합적인 조사를 촉구했다.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은 “우키시마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해난사고”라며 “바다 아래 잠든 유해를 찾고 진상을 밝히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키시마호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유가족들 역시 70세~80세 사이의 고령”이라며 “기억에서 더 잊히기 전에 정부가 속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공식 사과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생존자와 유가족 일부는 지난 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및 공식 사과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손해배상 시효가 지났고,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희생자들의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맞섰다. 일본 법원은 결국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제소위원회에서 법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종술 변호사는 “국제법상으로 전쟁범죄, 반인륜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정부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불법적인 행위로 우키시마호가 침몰당했다는 것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법원 등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언급도 있었다. 지난 2012년 대법원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놨다. 한 변호사는 “정부가 우키시마호 사건뿐만 아니라 식민지배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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