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기사승인 2017-08-0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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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 일본 교토=정진용, 이소연 기자]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른다. 고향이 어디인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들의 마지막 순간뿐이다.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는 지난 40년간 ‘신원불명’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일을 지속해왔다. 

지난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부푼 마음으로 고향 가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끝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부산으로 향하던 우키시마(浮島)호는 일본 교토(京都)부 마이즈루(舞鶴)만에서 두 동강 나 침몰했다. 그 수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지역으로 강제동원됐던 조선인과 그 가족이었다. 일본 정부의 피해 조사는 엉터리였다. 한국 정부 역시 이들을 외면했다. 침몰한 배는 9년이 지난 뒤에야 인양됐다. 온전한 유골 수습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키시마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한 이는 마이즈루시의 시민들이었다. ‘우키시마호 순난(殉難·재난을 당함)자를 추도하는 모임’의 의장 요에 카츠히코(76)씨는 희생자 추모에 힘써 온 인물 중 한 명이다. 일본 교토 출신인 그는 지난 67년 마이즈루 중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이후 우키시마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해왔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5월 마이즈루시를 방문, 요에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키시마호 참사를 추모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지난 78년 선배 교사였던 츠카모토 코사쿠씨가 우키시마호 참사를 추모하는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 이를 수락해 ‘우키시마호 순난자의 비(순난비)’를 만든 것이 추모의 계기가 됐다. 본업인 교사 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 틈틈이 작업을 진행했다. 늘 새벽 1~2시까지 작업을 해 제작 기간 동안에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우키시마호 참사가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기 위해 공부해왔다.

-70년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심했던 시기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선친께서 조선인들과 친밀한 관계였다. 아버지는 술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셨다. 교토 내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밀주를 만들어 팔던 ‘40번지’에서 늘 술을 드셨다. 그러다보니 조선인들과 친해졌고, 나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게 됐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됐을 때 느꼈던 감정은 어떠했나

우키시마호 참사는 일본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왜 조선인들이 일본까지 끌려왔는지,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순난비를 제작하면서도 끝없이 이를 되뇌었다. 결국 우키시마호의 비극은 일본의 식민지배, 전쟁 정책과 관련돼 발생한 사건이었다. 

-마이즈루 시민들이 우키시마호 추모에 호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즈루시는 일본 해군사령부가 있던 군항도시였다. 연합군의 직접적인 폭격을 받는 등 전쟁을 경험한 곳이다. 마이즈루 시민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전쟁의 참혹한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우키시마호 참사 또한 식민지배, 전쟁의 결과로 인한 비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즈루 시민 사이에서 이 사건을 계속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인 것이다.  

-우키시마호 사건 추모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나 

참사 이듬해인 지난 46년부터 마이즈루시 도덕사에서 추모위령제가 열렸다. 이후 마이즈루시 내 중학교 교사 등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우키시마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상징물을 건립하자는 운동이 진행됐다. 시민들로부터 모금을 받아 실행위원회가 세워졌고, 78년 순난비가 건립됐다. 이후 우키시마 순난자를 추도하는 모임이 결성됐다. 꾸준히 순난비 앞에서 추도 집회를 열었다. 올해가 40회째다. 집회에는 마이즈루 시민 등 300여명이 참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리기 위해 인형극, 책자, CD 등을 제작해왔다. CD 속 영상에는 한글 자막을 넣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에게도 우키시마호 참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마이즈루시 시모사바카 인근에 순난비가 설치된 이유가 있다면

시모사바카 마을은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던 장소와 가까운 지점이다. 침몰 당시, 배에 있던 기름이 흘러나오며 마이즈루 앞바다는 ‘불바다’가 됐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시모사바카 마을에 사는 아주머니 한 분이 쪽배를 타고 구조에 나섰다. 전장으로 나갔다 전사한 아들이 생각났기에 지체 없이 구조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도 작은 배를 타고 구조 활동에 나섰다. 시모사바카 마을에서 구해낸 인원이 100여명 정도라고 전해 들었다. 

이후 순난비를 설치할 장소를 고민할 때, 시모사바카 마을에서 땅을 기꺼이 제공해줬다. 바닷가 마을은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굉장히 귀하다. 적은 면적이었어도 당시의 참상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를 제공한 것이다.

-40년간 추도집회가 이어져 올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한 것이 원동력이 됐다. 또한 처음 순난비 건립 실행위원회로 활동할 당시 종교와 정치색을 불문하고 시민들의 힘으로 추모를 진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지켜왔기에 마이즈루시의 집권당이 교체되더라도 갈등 없이 추모를 지속할 수 있었다. 

-추도모임을 운영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크게 힘든 점은 없었다. 다만 함께 모임을 운영해오던 이들이 나이를 먹으며 인원이 줄어들고 있는 게 문제다. 추도회 의장을 맡고 있지만 총무 등의 역할도 함께 맡으며 일인 다역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후임자를 열심히 물색하고 있는 중이다. 

-우키시마호 추모 활동을 하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지난 95년 우키시마호의 참상을 다룬 영화 ‘아시안블루’가 일본에서 제작됐다. 이후 2000년대 초·중반 한국과 중국 등에서 상영회를 열었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광주, 부산, 경주, 울산 등에서 상영됐다. 서울 서대문구 창천교회에서 열렸던 상영회에 참석했다. 당시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영화 상영 당시, 일본 교과서 문제로 한·일 관계가 좋지 못했다. ‘일본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할 때였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조선인의 희생을 추모하는 일본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순난비 역시 영화를 제작하려고 일부러 건립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기도 했다. 마이즈루에서 지속해온 추모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니 진정성을 이해해줬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우키시마호 참사의 진상규명이나 추모 등에 무관심한 상황이다 

양국 정부는 희생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일본의 경우, 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우키시마호의 참상을 믿지 못한다. 역사 교과서 등에도 전혀 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노력하지 않는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양국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통해서라도 우키시마호 관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 주민들이 힘내서 우키시마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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