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사승인 2017-08-07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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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 일본 교토= 정진용, 이소연 기자] # "여기가 나의 무덤이다"

'단바망간기념관(丹波 マンガン 記念館)'(이하 단바기념관)이 위기를 겪고 있다. 이곳은 일본 내 유일한 강제동원역사관이다. 교토(京都)시 우쿄구(右京区) 게이호쿠초(京北町)에 위치한 단바기념관은 재일동포 2세 고(故) 이정호(1932~1995) 전 관장이 사재를 털어 건립했다. 현재는 셋째 아들 이용식(58)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단바기념관은 조선인 수만 명이 착취당했던 탄광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다. 지난 1930년대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지역으로 강제 동원됐다. 가혹한 노동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속출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나가사키(長崎) 하시마 탄광에 끌려간 600명의 조선인 중 122명이 사망했다. 후쿠오카(福岡県)현 아소 탄광에 동원된 7996명 중에서는 5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극소수였다. 

▲ 1톤 광차 끌고 밥은 보리밥 한 공기…돈 없어 귀향도 못 해

고 이 전 관장이 기념관 건립을 고집한 이유는 하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 계기는 진폐증(폐에 석탄가루가 쌓여 점차 굳어지는 병)이었다. 고 이 전 관장은 16살 때부터 망간을 캤고, 결국 진폐증에 걸렸다. 그는 진폐증을 노동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맞서 싸우다 조선 동포들을 알게 됐다. 다들 글자를 몰라 보상 신청을 못하거나, 돈이 없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었다.

고 이 전 관장은 아들과 함께 3년 동안 13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났다. 22살때인 지난 1943년 일본에 건너온 김갑선씨는 "사람을 모집한다며 마을에 일본 사람들이 잔뜩 왔다"면서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일본에 가기 싫었지만 헌병이 가족을 고문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교토(京都)부 가메오카(龜岡)시에 위치한 오타니 광산에 끌려와 텅스텐을 채굴했다. 작은 트럭 한 대 무게와 맞먹는 1톤 광차(광석 및 자재를 수송하는 차량)를 미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밥은 보리밥 한 공기가 다였다. 결국 광산에서 도망쳤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씨 부자가 만난 또 다른 증언자 정갑천씨는 아소그룹 산하 아카사카 탄광에 끌려갔다. 그는 지하 1000m 에서 석회를 캐내는 노동에 동원됐다. 정씨는 "말만 모집이지 청년을 억지로 끌고 갔다"면서 "낙반 사고와 가스 폭발사고가 자주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조선 사람들이 한 번에 열 명이나 사망한 적이 있었는데 땅에 개 묻듯이 묻고 끝이었다"면서 "임금은 부모님께 송금했다고 들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돈을 부치지도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해방된 뒤에도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고향에 돌아갈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 맺힌 증언과 사진은 고스란히 단바기념관에 전시됐다.

이들을 만난 뒤 고 이 전 관장은 다짐했다. '조선인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기념관 건립에 매진했다. '이곳이 내 무덤'이라는 말은 고 이 전 관장의 입버릇이 됐다. 그는 병원 입원 대신, '스테로이드'를 꽃은 채 기념관을 오갔다. 가족은 아버지의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온 가족이 기념관에 매달렸다. 첫째 아들은 직장을 그만뒀다. 

기념관 건립은 녹록지 않았다. 가장 고된 일은 갱도를 확장하는 일이었다. 폭 90cm, 높이 120cm의 갱도를 방문객이 들어갈 수 있는 높이 2m, 폭 2m로 늘리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지만, 하루 10cm 정도 진척될 뿐이었다. 교토부, 게이호쿠초 등 일본 지자체에 융자와 운영보조금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단기간 독한 약을 대량 투여한 탓에 고 이전 관장의 진폐증은 빠르게 악화됐다. 그는 결국 기념관 개관 6년째 되던 해에 숨졌다.

▲휴대폰조차 터지지 않는 외딴곳.가족이 고군분투하며 지켜온 박물관

일본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던 지난 5월24일,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건립 18년째를 맞은 단바기념관을 찾았다. 교토에서 출발해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을 1시간여 달렸다. 휴대폰도 되지 않는 외진 곳. 울창한 삼나무 숲 속 단바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념관은 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기록을 보관한 전시관, 실제로 조선인 광부들이 숙식했던 함바집, 갱도 체험관으로 이뤄져 있다. 

입구 정면에는 함바집이 자리 잡고 있다. 함바집 내부는 캄캄했다. 변소, 식당, 침상은 구분되지 않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몸을 눕힐 공간은 길이 2m, 너비 1.5m 남짓의 평상이 다였다. 20여명이 이곳에서 칼잠을 잤다식사도 형편없었다. 이들은 여기서 무청, 시래기, 고사리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함바집을 나와 갱도로 들어갔다. 한여름이었지만 내부는 서늘했다. 곳곳에 노동자들을 재현한 마네킹들이 서 있었다. 허리도 피지 못한채 괭이로 망간을 캐내고, 차오르는 지하수를 온종일 펌프질하던 모습 그대로다. 칠흙같은 어둠 속, 소라 껍질에 기름을 넣은 등잔불에 의지해 노역하는 노동자를 묘사한 마네킹도 있었다. 이 관장은 "마네킹이 입은 옷은 어머니가 직접 미싱을 박아 만든 것"이라며 "다리가 고장 난 인형의 바지를 입히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웃었다. 

갱도 옆 공터에는 강제동원노동자상(노동자상)이 서있었다. 갱도에서 막 빠져 나온, 뼈만 앙상한 조선인 노동자의 모습이다. 이 노동자상은 지난해 8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주도로 세워졌다. 건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건립식 당일, 일본은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의 입국을 거절했다. 노동자상만 흰 천으로 가려진 채 반입됐다. 노동자상 뒤에는 진분홍색 철쭉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이 관장은 "심은 적도 없는 데다 처음 본다"면서 "노동자들의 영혼이 위로 받아 피어난 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매년 500만엔 적자.정부 도움은 8년 전 국민포상금 500만원뿐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기록한 기념관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뒤 부는 우경화 바람은 단바기념관에도 불어 닥쳤다. 지난 2015년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시 주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에 배설물을 투척한 것으로 알려진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가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상이 건립된 뒤에는 넷우익(인터넷을 기반으로 국수주의 성향을 띄는 이용자)이 무단으로 단바기념관에 들어와 사진을 찍어 온라인상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강제동원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항의 전화는 비일비재했다.

일본의 냉대와 견제보다 큰 어려움은 돈이었다. 단바기념관은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는 지난해 양대노총이 기부한 돈과 연 3000명 수준의 방문객이 내는 입장료로 연명하고 있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돈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매년 지원금을 받지 않는 이상 이곳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한해 적자가 500만엔(한화 약 5085만원)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또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것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 도움은 지난 2013년 이후로 중단됐다.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를 꾸려 운영비를 모금했던 배덕호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는 "이 관장과 법인이 단바기념관 운영을 놓고 분열 되면서 지원을 멈췄다"며 "한국 측은 측면 지원만 하는 입장이라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다"고 전했다. 이어 "현지 사정을 몰라 앞으로도 지원 계획을 섣불리 잡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단바기념관이 받은 정부 지원금은 이명박 정부 당시 포상금 500만원이 전부다. 이 관장은 지난 2009년 9월30일 재외동포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았다. 이마저도 기념관이 아닌 이 관장 개인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 외에 한국 정부가 단바기념관에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강제동원 피해지원 '컨트롤 타워' 부재."재일동포 어쨌든 일본인, 도와줄 법적 근거 없어"

현재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할 정부 차원의 '컨트롤 타워'는 없다. 지난 2015년 12월31일자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 희생자 위로금 지급 등을 담당하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동위)가 폐지된 까닭이다. 이후 업무가 행정안전부 소속인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으로 이관됐으나, 소속 민관조사관은 4명에 불과하다.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일부 업무를 공공재단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맡긴 상태다. 추모사업도 재단이 진행하는 사업 중 하나다. 재단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단바기념관 지원에 선을 그었다. 재단 관계자는 "아무나 어렵다고 해서 도와줄 수는 없다"면서 "문화체육관광부나 행안부를 통해 국고지원사업에 신청하면 되는데 조건이 맞을 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어 "박물관 운영자가 한국인이면 또 모르지만 일본인이라는 점도 지원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며 "재일동포 2세라도 어쨌든 일본인"이라고 일축했다.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강제동원 지원프로그램은 따로 없지만 심사를 거쳐 지원할 수도 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협력실 관계자는 "위안부와는 달리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은 현재 없다"면서 "강동위와 업무중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프로그램을 개설하지 않았다. 위안부는 일제강점기 피해 역사 중 가장 큰 이슈여서 국가적으로도 여러 부처에서 지원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등 큰 규모로 지원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다만 "심사를 통해 재단의 비전과 맞는다는 판단이 나오면 시민단체를 통해 금전적 지원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단바기념관 보존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과거 징용이 이뤄졌던 탄광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것만으로도 보존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일본 내에서 강제징용을 기억할 만한 공간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일본 공유지 내에 있는 ‘강제동원지’ 추모비석 등은 현재 철거되거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단바기념관은 개인 사유지에 세워져 있어서 향후 지속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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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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