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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은 “간호사가 겁도 없다”고 말했다

[5·18 시민 곁의 그들④] 간호사, 계엄군 막아서다

김양균 기자입력 : 2017.08.19 00:06:00 | 수정 : 2017.09.18 15:31:11

[쿠키뉴스=김양균 기자] 1980년 5월 18일 전남대병원은 환자를 뉘일 자리도 모자랐다.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과 폭력에 숱한 시민들은 죽고 다쳤다. 의사와 간호사는 합심해 시민들을 치료했다. 병원에 들이닥친 계엄군 앞에 한 젊은 간호사가 이들을 막아섰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을 막아선 간호사인들 정치와 혁명을 알았던 건 아니다.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다. 

병원에 날아드는 총알 때문에 매트리스로 창문을 막았다는 간호사의 증언은 5·18 민주화항쟁 당시 병원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환자의 지근거리에서 이들을 돌본 간호사의 기록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쿠키뉴스 기획연재 ‘5·18 시민 곁의 그들’ 네 번째 연재는 간호사의 증언을 담았다. 

사진=전남대병원 제공


◇ 계엄군 위험 뚫고 병원 모인 간호사들

나는 1962년 9급 공무원 공채에 합격하면서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전남대병원 간호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중략) MBC방송국에 크게 화재가 났던 20일 밥에는 총상 환자가 남편의 병원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총상 환자가 출혈이 많아서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근무하던 전남대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얼른 구급차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환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누군가 “일단 들것을 이용해서라도 MBC방송국 주변 큰 길로 가면 환자들을 후송하는 일반 차량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병원에서는 그 말대로 환자를 데리고 현장에 갔고, 그 곳에서는 학생들이 환자들을 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총상환자는 그렇게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튿날인 21일은 석가탄신일이었다. 그 날은 헬리콥터에서 ‘시민 여러분, 우리는 경찰서나 은행 등을 잘 지키고 파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모두 우리 소중한 재산이다’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중략) 휴무일이어서 근무자가 많지 않은 날이었다. 

일찍 출근을 했던 나는 한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걱정 섞인 말투로 “과장님 계엄령이 내려졌는데 출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안타깝지만 만약 너희들이 오다 사고라도 나면 나는 책임을 질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오려면 반드시 유니폼을 입고 와라. 그래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중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다음날 가족들이 빠짐없이 출근한 것이다. 간호사 중에는 광주 인근 화순이나 장성 등에 살고 있는 간호사들도 있었고 멀리 장흥에 가 있던 간호사도 있었다. 그 먼 거리를, 그것도 무서운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을 뚫고 모두 병원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퇴근을 하지 못한 채 병원에서 계속 근무했다. 

(1980년 5월) 21일부터 총상 환자들이 잇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응급실이 환자로 가득 차는 바람에 원무과가 있는 로비로 내보내기도 했다. 이는 응급실이 좁은 이유도 있었지만 군인들이 화순 쪽으로 나가면서 총을 쏘았기 때문에 이를 피하자는 의도도 포함됐었다. 

우리는 총격의 대비책으로 매트리스를 활용했다. 당시 병원에는 과거에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매트리스가 있었다. 전화로 확인해보니 솜으로 된 매트리스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가져다가 응급실 처치실의 유리창에 대도록 했다. 그 날 군인들이 난사한 총알 중 일부는 매트리스에 박혔고 3층의 원장실, 11층의 입원실에도 총알이 날아들었다. 

당시 응급실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학생과 차들이 한꺼번에 환자를 데려오는 바람에 중환자의 경우 일일이 신원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나는 수간호사에게 ‘NS(신경외과)’, ‘OS(정형외과)’ 등 과명을 종이에 써서 환자 가슴에 붙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각 과에서 내려와 환자를 데리고 갔고, 그 곳에서 필요한 촬영을 한 뒤 수술실로 옮겼다. 갑자기 밀려드는 환자로 인해 간호 인력이 부족하자 감독을 통해 각 병동에는 기본 인력만 남겨두고 모두 모이도록 했다. 

어느 날 병도에 근무하는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군인들이 들어와서 병실을 수색한다고 했는데 한 간호사가 그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밤에 함부로 환자 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가 들어가려고 해도 간호과나 윗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 그 군인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아, 우리가 장소를 잘못 알았다. 우리가 갈 곳은 이곳이 아니고 의대였다”고 대답하고는 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병실 수색을 하지 못한 채 바로 가게 된 셈이다. 그 후에 보니 군인들이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군인들이 밥을 굶고 있는 것 같아 갖고 있었던 김밥을 주었다. 

“우리가 모두 같은 민족인데, 지난번에 군인이 총을 쏘는 바람에 사태가 커진 듯하다. 그래도 굶으면 되겠느냐. 탈이 나거나 위험한 음식이 아니니 먹어라”고 했지만 그 군인은 거절했다. 내가 몇 차례 밥을 권유하고 말을 걸면서 낯이 익은 탓인지 언제인가 한 군인이 내게 불쑥 말을 걸어왔다. 

“간호사들이 참 겁이 없다.” 그는 “학생들이 입원실에 숨었다고 해서 뒤지려고 했는데 간호사들이 절대 못 들어간다고 막아서더라. 무섭지도 않았는지 그런 말을 하더라”라고 했다.(중략) 

당시 병원에 온 환자 가운데 가장 먼저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해도 눈물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그는 낯선 유니폼을 입고 있고 50대 쯤 되는 것으로 보아 어느 회사의 간부가 아닐까 생각됐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쿨쿨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얼른 수혈부터 시작했다. 우리가 공급하는 피가 들어가고 한편으로는 밖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얼른 혈액원으로 전화를 했다. 그곳에서는 시민들이 모두 나와 헌혈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출혈이 심한 환자가 있으니 어서 피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피를 계속 수혈했으나 그 환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에게 공급하던 피는 여전히 남은 상황이었다. 영안실에 연락해서 사망자를 데려가도록 해 놓고도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애들의 아빠일 텐데, 지금까지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중략) 

남편이 운영한 병원에 온 환자 가운데에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당시 학생 한 명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온 일이 있었다. 병원에서는 혹시 모를 불상사나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차트를 남겨놓지 않았다. 그는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다. 응급처치를 한 뒤 나는 그에게 이곳에 오래 있으면 큰 일이 날 수 있으니 될수록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형사라고 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연락을 취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 4시쯤에 그 학생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훗날 5·18유공자 지정 문제와 관련해 그 학생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았던 사실을 제시한 모양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여서 내가 조사관에게 당시에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그 후로 그 학생이 유공자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후략) 

*이 글은 전남대병원의 협조로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수록된 김안자 1980년 당시 전남대병원 간호과장의 증언 <간호사는 항상 환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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