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태국 최고 엘리트 대학의 ‘굴욕’

권위주의 관습 따져묻는 학생들

기사승인 2017-08-19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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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태국 방콕=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지난 15일(현지시간) 오후 방문한 방콕의 출라롱콘 대학교 학생회(Student Council) 사무실에는 2학년 학생 예닐곱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대학 학생회장들과 학생회 운영위원들로, 총학생회장 네티윗 초티팟파이산(21·정치학과 2년)은 5월초 단과대 학생회장들의 투표로 선출됐다. 단과대 학생회장들도 각 단과대 학생들의 투표로 뽑혔다. 

이렇듯 촘촘한 학내 선거를 거쳐 구성된 학생회 임원 중 8명은 현재 학교의 징계대상 명단에 올라 조사를 받고 있다. 징계 결과에 따라, 행동평가 점수가 크게 깎이면 최악의 경우 제적당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태국 최고의 명문대 출라롱콘 대학, 그곳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11일 학생처로부터 공지문을 받았다. 두 개의 학생규율을 어겼다고 하더라. 하나는 학생회 사무실을 허가 없이 이용했다는 것이다. 앞서 2일 인근에 새로 들어선 수앙루앙 스퀘어 쇼핑센터(출라롱콘 대학이 임대인) 상인들이 임대 문제로 겪는 고충을 공청회를 통해 들어보려고 했지만 학교 측이 막았다. 그러나 우린 공청회를 강행했다. 또 다른 하나는 학생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건데….” 

대학 선도위원회가 나서서 조사할 만큼 ‘부적절한 행동’에 이들이 연루된 건 지난 3일 벌어졌다. 이날 출라롱콘 대학에서는 일명 ‘충성 맹세의식’(이하 맹세의식)이 진행됐다. 신입생이라면 참가해 동상 앞에 단체로 존경과 충성심을 바치는 의식이다. 동상은 출라롱콘 대왕(통치기간 1868년~1910년), 즉 라마5세과 그의 아들이자 대학 설립자인 라마 6세 와지라윳(1910년~1925년)을 본따 만들어졌다. 

대학의 의도대로라면 미래의 엘리트들은 약 100년 전 타계한 대왕의 동상 앞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왕정주의의 숭고함을 가슴깊이 새기게 된다.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몸을 깊이 굽혀 절을 하는가 하면, 다시 몸을 세워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맹세문을 암송하고 노래도 부른다. 


◇ 무릎 끓고 하늘에 맹세하지만…

절의 자세를 ‘그랍’(graab 또는 prostration)이라고 부른다. 태국에서 일반인들은 왕실 가족 앞에 같은 높이로 앉거나 서지 못하며, 그랍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종종 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갑질 논란 사건에도 바로 이 그랍이 등장한다. 을 신분의 사람에게 그랍 자세를 강요하며 벌을 주는 갑의 횡포가 그것이다. 지난 해 9월 에어아시아 항공기내에서 한 승객이 승무원에게 그랍을 요구한 경우가 한 예다.  

출라롱콘 대학의 경우를 살펴보자. 태국의 파워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에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신입생들이,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동상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표하는 의식은 태국 내 지배기득권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찰나’가 반영돼 있다. 네티윗과 그의 동료들이 징계대상으로 조사받는 건, 바로 이 맹세의식 중 학교 측과 빚은 갈등 때문이다. 

네티윗에 따르면, 대학 측은 학생회 임원들을 옵저버(Observer, 자리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지만 권리와 의무에선 배제되는 직책)로 초대했다. 옵저버로 참여하면서 학생회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의식 참가를 원치 않는 학생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할 것과 비가 오면 야외의식을 강행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가 내렸지만 맹세의식이 계속 이어지자 학생회 대표는 집단 퇴장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퇴장을 막으려던 교수 한명이 한 학생의 목을 팔로 제압하듯 감는,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다른 교수는 이 장면을 촬영하려는 학생들을 거칠게 제지하기도 했다. ‘성스럽고 경건하게’ 치르려던 의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랍은 출라롱콘 대왕이 폐지한 관습이다. 굳이 이를 폐지한 왕의 동상 앞에서 의식을 치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왕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교수의 팔에 목을 감기는 수모를 당한, 부총학생회장 수팔락 담롱짓(23·경제학과 4)이 반문했다. 수팔락은 사건 직후 경찰서로 향했다. 처벌이나 조사를 원해서가 아니라, 교수의 불합리한 행동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출라롱콘 대학의 맹세의식은 이미 지난 해 7월에도 한차례 소란을 겪은 바 있다. 현 학생회장인 네티윗이 신입생 시절 동기 한 명과 의식에서 퇴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례 없는 일로 태국사회에서 매우 큰 용기를 요하는 행동이다. 네티윗의 설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라마 5세(출라롱콘 대왕)가 이 전통을 폐지했음에도 해오던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지속하는 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출라롱콘 대왕은 1873년 그랍을 폐지했다. 그해 <시암왕국관보>(Royal Siamese Government Gazette, 시암은 태국의 과거 국호)에는 출라롱콘 당시 국왕이 왕실 가족과, 고위 관료, 군 대표 등을 불러 이 관습의 폐지를 발표했다고 적혀 있다. 절대왕정 시대 국왕의 발표는 곧 법이었다. 

“프로스트레이션(prostration), 즉 몸을 깊숙이 엎드려 절하는 행위는 매우 억압적인 관습이다. 평민들이 푸야이(‘높은 사람’이란 뜻)에게 존경심을 표하고자 자기 몸을 굽혀 기는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풍습을 유지하는 게 시암에 어떤 국익을 가져오는지 모르겠다. 윗사람과 용무가 끝날 때까지 오래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함으로, 신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풍습은 억압의 원천이다. 고로 나는 이를 폐지하고자 한다.”   

1932년 혁명을 거쳐 절대왕정 국가 시암은 입헌 군주국으로 거듭났다. 몸을 기다시피 하는 절 관습이 폐기된 지도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관습은 군부독재 하에서 부활했다. 1957년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사릿 타나랏(Field Marshall Sarit Thanarat)은 라마 9세 푸미폰 국왕(1946년~2016년 통치)과 왕실 홍보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랍을 되살렸다. 이후 1990년 태국 보수 엘리트들의 요람으로 알려진 출라롱콘 대학은 맹세의식을 신입생 연례행사로 도입했다. 

 [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태국 최고 엘리트 대학의 ‘굴욕’

◇ 164년 전 폐지된 절 관습, 군부독재 시대 되살아나 

이번 사태를 두고 출라롱콘 대학은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대학 측은 당시 상황을 해명하는 1차 영문 성명서에서 “나쁜 의도를 가진 여러 그룹들이 있었고 네티윗이 그 중 한 그룹을 주도했다”고 적었다. 학생회가 대학 측 성명 중 사실 관계의 오류를 지적하자 대학은 곧 “(태국어에서 영문으로) 번역 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며 글을 내렸다. 수팔락의 목을 쥔 교수의 폭력 행위는 동료 교수에 의해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이 “좋은 의도로 한 것”으로 포장됐다. 

학창 시절부터 권위주의를 배격해 온 네티윗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있다. 태국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기도 한 그를 두고 태국의 보수 엘리트 진영은 불편함과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가 속한 출라롱콘 대학도 그중 하나다. 지난 해 6월 이 대학의 모 교수는 네티윗에게 “출라 학생이 되기에는 외모가 ‘딸린다’”고 말했으며, 프라윳 찬오차 군정 총리도 5월 초 그가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자, “출라롱콘 대학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네티윗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이 나라에 진정으로 불명예스러운 자는 누구인가? 정치를 하고 싶으면 정당을 만들어야지 당신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지 않았나. 나와 우리 젊은 세대에게 ‘프라윳 총리 각하’는 지난 3년 동안 태국의 평판을 실추시킨 장본인일 뿐이다.”  

이렇듯 네티윗과 프라윳 총리간의 언쟁이 오간지 일주일이 지난 5월 15일 네티윗은 한 통의 엽서를 받았다. 엽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네 조상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 나라로 돌아가라. 태국 국적(Thai Nationality)과 태국 인종(Thai race)을 이용하지 말고.”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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