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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⑨ “화장실 따라와 늦게 나오면 매질” 근로정신대 끌려간 13살 소녀

[쿠키뉴스 특별기획]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민수미 기자입력 : 2017.09.04 05:30:00 | 수정 : 2017.09.11 18:29:53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쿠키뉴스=민수미, 박효상 기자] 언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내가 바란 건 고작 그거다. 언니를 만나는 것.

1945년 2월. 당시 13살의 나는 평범한 학생 김정주였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조잘거리다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이 나오면 복도에서 벌을 서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보통의 일상이었다. 어느 날 일본인 선생님은 나를 불러 말했다. “정주야, 일본으로 가. 일본 가면 언니랑 같이 중학교 다닐 수 있어.” 언니는 먼저 일본으로 끌려갔다. 선생님의 제안 같은 강요가 무서웠다. 하지만 편지 한 장, 소식 한 줄 없던 언니를 일본에 가면 만날 수 있다니.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언니를 찾아 떠났다. 정신 차려보니 도착한 곳은 일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 공장. 혼자가 아니었다. 나이 비슷한 많은 소녀가 같이 끌려왔다. 불길한 기운이 돌았다. 모두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공장에 발을 딛자 누군가 우리에게 군복을 나눠줬다. 또 기미가요를 가르치고 일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종일 서서 비행기 부품을 만들어야 했다.

미소 된장국, 식빵 반쪽. 밥은 그게 다였다. 저녁에는 단무지 세 조각과 조그만 밥 한 덩이가 나왔다. 그것마저 주지 않아 이름 모를 풀을 뜯어 먹는 날이 다반사였다. 영양부족으로 한 주먹씩 머리가 빠졌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일이었다. 남자 단장들이 항상 뒤를 따라붙었다. 조금이라도 늦는다 싶으면 매질을 했다. 고통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목욕이란 걸 해본 적 없다. 여름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은 그곳에 없었다.

일이 끝나면 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기숙사라고 편히 쉴 수 있었을까. 방 한 칸의 주인은 스물네 명. 쪼그려 눕기도 벅찼다. 지역별로 사람을 모아놨다. 경기도에서 끌려 온 수백 명이 위층을 썼다. 한 사람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모두가 울었다. 매일 눈물바다였다. 내가 뭣 하러 여기 왔을까. 언니는 어디 있을까. 내가 일본에 왔다는 사실을 알까. 나중에서야 언니 소식을 들었다. 언니는 미쓰비시 중공업 군수공장에 있었다.


입고 온 옷가지를 베개 삼아 몸을 눕히기도 잠시, 매일같이 공습경보가 울렸다. 때문에 우리는 신발을 벗고 자는 법이 없었다. 경보음이 울리면 이불을 둘러싸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눈이 말도 못 하게 쏟아졌다. 동상에 걸려도 장갑 하나 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저 얇은 천 하나에 의지해 이 상황이 끝나길 기다려야 했다. 춥고 어두운 밤은 길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철조망이 너무 높았다. 위층 언니는 탈출하다 잡혀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렇게 열 달. 해방됐으나 해방된 지 몰랐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다. 11월 어느 날, 일본인들이 우리를 줄 세웠다. 또 어딘가로 끌려가는구나. 두려움과 체념의 반복이었다. 도착한 곳은 전남 여수, 한국이었다.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셨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언니 그리고 나까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모두 강제 동원 피해자가 됐다.

돌아온 나는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잊고 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분하다. 서럽다. 싸워야 한다. 피해자들과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패소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 또 발목을 잡았다. 우리 동의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보상금을 받았다. 정부는 그 돈으로 고속도로를 만들고 포항제철을 세웠다. 일본만큼 야속한 대한민국. 우리나라로 돌아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조국이 준 배신은 몇 배로 아팠다. 

재판을 거듭, 지난 3월 우리나라 법원에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11월에도 법원은 1인당 1억원 지급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은 아직 젊은 날의 악몽 같은 시절을 보상하지 않았다. 제일 원하는 것은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다. 하지만 내 생에 그런 날이 오긴 쉽지 않겠지.

같이 끌려갔던 많은 친구가 죽었다. 나라고 다를까. 피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외면이 더 익숙하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외쳐야겠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의 어린아이들이 일본에 끌려가 노역에 시달렸고 어떤 사죄나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 정부가 6억 달러를 받고 모든 배상 포기를 일본에 약속했다는 것을.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은 광복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본 기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씨의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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