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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⑪ “한국인은 열람 못해”…여전히 찾지 못한 이름들

[쿠키뉴스 특별기획]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소연 기자입력 : 2017.09.14 05:30:00 | 수정 : 2017.09.14 17:06:20

강제동원피해자 최천호씨의 아들 최낙훈씨가 흑백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을 주름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최천호씨가 강제동원되기 전에 남긴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 “명단에 이름이 없습니다”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을 찾은 하명오(70)씨는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하씨에 따르면 하씨의 아버지 고(故) 하응호씨는 과거 2번이나 강제동원됐다. 하씨는 아버지로부터 “한 번은 자신의 이름으로, 한 번은 남의 이름으로 끌려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다. 그러나 국가가 보유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에 ‘하응호’는 없었다. 하씨는 “아버지가 강제동원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며 “어딘가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는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총 3차례에 걸쳐 강제동원 피해 신고를 접수받았다. 총 22만6583건이 접수됐다. 그러나 이 중 자료 부족 등으로 인한 ‘판정 불능’ 사례는 6177건에 달했다.  

강제동원피해자 신정철씨가 과거 사할린에서 집으로 보내온 편지.자녀인 신윤순씨는 편지를 통해 아버지의 강제동원지가 사할린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 일본·러시아에 잠든 이름들…“한국인은 열람 못해”

강제동원을 입증할 자료는 대다수 국외에 잠들어 있다.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 공공기관에는 조선인의 명의로 된 ‘우편저금’과 ‘예탁금’이 존재한다.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누가, 어느 시기에 강제동원 됐는지 파악할 토대가 된다. 과거 일본 정부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저금을 강제했다. 식민지 주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임금 일부는 우편저금으로 매달 저축됐다. 예탁금도 마찬가지다. 일본 측은 45년 9월부터 외지에서 귀국한 사람들의 통화와 증권 등 재산을 정부에 예탁하게 했다. 해외로 끌려갔던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이 대상에 포함됐다. 지난 2014년 일본 세관 8곳에 반환되지 못한 조선인 명의의 예탁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일본 내 일부 사기업에도 노무동원 피해자의 명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문서에만 공탁한 내역을 기록한 공탁금 명부가 대표적이다. 일례로 일본 규슈(九州)대학 석탄연구자료센터는 규슈 후쿠오카(福岡) 아소(麻生) 탄광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1897년부터 1942년까지의 장부 등 1만5967건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약 7000여명의 조선인이 아소 탄광에 강제동원돼 혹사당했다. 그러나 해당 문건은 철저히 비공개로 관리되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아소 기업에서 해당 자료에 대한 ‘한국인 열람 불가’를 기증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전했다.   

러시아 사할린에도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된 기록물이 남아있다. 사할린은 지난 1905년부터 45년까지 일본의 영토였다. 당시 ‘가라후토(樺太·화태)’로 불렸던 사할린에는 조선인 약 3만여 명이 강제동원됐다. 한국 정부는 2014년 러시아 정부의 협조 아래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조사관 10명이 사할린에 파견됐다. 이들은 약 두 달 동안 강제동원된 조선인 6200여명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 용모 등 인적사항을 확보했다. 지난해에는 1명의 연구자가 예비조사 명목으로 파견돼 강제동원 피해자 500여명의 명단을 찾았다. 그러나 예산 등의 문제로 이후 조사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2014년 발굴된 명단을 실제 피해자와 대조하는 작업도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강제동원피해 유가족인 최낙훈씨

▲아버지 행적 찾아 헤매는 유가족 “유해만이라도 찾고 싶다”

정부 보유 문건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스스로 나서야 했다. 최낙훈(77)씨는 지난 91년부터 강제동원된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최낙훈씨의 아버지 최천호씨는 지난 42년 일본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됐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냈던 편지를 단서로 함께 동원됐던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지난 2000년부터는 거의 매년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후쿠오카(福岡) 등을 돌며 후생성과 일본연금공단 등의 문을 두드렸다. 외교부에 부친의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탄원서도 썼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정부 그 어느 곳도 그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최천호씨의 일부 행적이 확인된 것은 2014년의 일이다.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에서 활동하던 우에다 케이시씨의 도움으로 최천호씨가 10개월간 후쿠오카 가이지마(貝島) 탄광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행적은 여전히 묘연한 상황이다.  

신윤순(73·여)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희생자 한국유족회장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다. 신 회장의 아버지인 신정철씨는 지난 43년 10월 강제동원됐다. 신 회장은 지난 2009년에야 아버지의 강제동원지가 일본이 아닌 러시아 사할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사할린을 직접 방문했다. 성과는 없었다. 사할린 현지 동포에게 100만원을 주고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수소문을 부탁했다. 지난 2013년 답변이 왔다. 신씨가 지난 52년 사할린 돌린스크 경찰청에서 외국인 등록증과 같은 ‘임시 거주 증명서’를 발급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임시 증명서로는 신씨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유가족은 정부를 향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최낙훈씨는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유가족이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실정”이라면서 “일본에서는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증언도 부정 중이다. 그런데 자료도 없는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보상이나 사과 등을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신 회장은 “분명히 사할린에 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을 것”이라며 “아버지의 기일이 언제인지 알고 싶다. 어느 지역에서 돌아가셨는지를 알면 유해 역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호소했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명부 발굴, 전문가도 역부족 “정부 의지가 가장 중요…혼자서는 할 수 없어”

국외 명부 발굴을 위해서는 정부의 총체적인 노력이 촉구된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 2007년과 2010년 각각 군인·군속과 노무자의 예탁금 자료 일부를 한국 측에 제공했다. 그러나 추가적인 자료 입수는 진행되지 못했다. 해당 자료가 강제동원 피해 소송의 근거로 활용되자 일본 측에서 제공을 꺼리고 있다. 

러시아와는 명부 발굴 관련 협약이 체결돼 있으나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러시아 지역에서의 명부 발굴을 위해서는 연구자 등이 각 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기록보존소를 직접 방문, 접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후 지자체에서는 하루 정도 자료를 검토할 수 있도록 시간을 지정해준다. 기록보존소의 자료들을 검토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할린 지역 기록보존소의 자료들은 대부분 전산화가 돼 있지 않은 ‘서류철’이다. 러시아어로 쓰인 자료를 살펴 조선인의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민감한 개인정보 등의 문제로 복사가 불가한 자료도 많다. 이러한 자료들은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2014년부터 사할린에서 명부 발굴 작업을 진행해왔다. 지난해에는 홀로 사할린에 파견돼 조선인 이름 찾기에 매진했다. 방 교수는 명부 발굴 작업에 대해 “소수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할린 내에서 아직도 못 가본 지역이 많다. 비포장도로로 7시간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기록보존소도 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사할린 등 각지로 파견돼 더 많은 피해자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영상=윤기만 adrees@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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