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두 유 노우 페이커?

[e스포츠의 미래를 말하다②] 규모로 보는 e스포츠의 잠재력

기사승인 2017-09-24 04:00:01
- + 인쇄

국내 e스포츠 선수들의 연봉이 프로야구 선수에 필적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계적인 e스포츠 스타 이상혁(페이커)의 경우 국내 프로야구 최고 연봉자인 이대호(4년 150억 원)에 비견되는 돈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스포츠는 각광받는 미래 스포츠 종목입니다. 북미와 유럽, 중국에서 연이어 거대한 투자자가 나타나고 있고 선수들은 일찌감치 억대 연봉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시장 규모나 인식은 여전히 초라합니다. 친(親) 게임정권이 출범해 기대를 받고 있지만, 당장의 인식과 시장규모는 마이너 내지는 지하세계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쿠키뉴스 스포츠팀은 e스포츠의 현 주소를 점검하고 유의미한 담론을 제시하고자 이번 연재물을 기획했습니다. e스포츠의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DO YOU KNOW FAKER?”

혹시 ‘페이커’를 아시나요?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이상혁의 게임 닉네임입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전국구 스포츠 스타 이상 가는 인지도와 인기를 갖춘 선수죠. 일각에서는 이 만 21세 청년이 프로 야구 최고 거물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나 기아 타이거즈 최형우와 엇비슷한 대우를 받는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페이커’ 석 자의 영향력은 바다 밖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유럽, 남미, 미국 등 어디를 가도 ‘페이커’가 새겨진 유니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력 외신 CNN, ESPN 등에서 그의 활약을 대서특필합니다. 국적불문 팬 미팅은 항상 만원을 이루고, 그가 등장하는 인터넷 개인 방송은 수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봅니다. 매해 재계약 시즌이면 지구촌 각지 프로게임단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천문학적 숫자의 이적료를 제시하죠. ‘페이커’는 월드 스타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온전히 ‘페이커’가 뛰어난 게임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가 오랜 시간 최고의 프로게이머 자리를 유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그에게 수십억 원을 투자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스포츠 시장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뉴주’가 올 초 공개한 바에 따르면 2017년 e스포츠 시장의 규모는 무려 6억9600만 달러(한화 약 790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전년도보다 41.3% 성장한 수치죠.

뉴주는 또 2020년에는 시장규모가 14억8800만 달러(한화 약 1조68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산업인 셈입니다.

‘페이커’가 플레이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입니다. 지난 2016년 제작사 라이엇 게임즈가 ‘폴리곤’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게임의 월간 접속자 수는 1억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e스포츠로서의 성공은 자명했죠. ‘누가 리그 오브 레전드를 가장 잘 할까?’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1억 명 가까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요.

라이엇 게임즈는 1년에 1번 세계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대회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을 개최합니다. 어느덧 7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이 대회는 이제 지구촌 젊은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가 됐죠. 약 60억 원의 우승 상금을 놓고 전 세계 16개 팀이 겨뤘던 지난 2016년 롤드컵 누적 시청자 수는 무려 3억9600만 명이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곧 e스포츠는 아닙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게임이 e스포츠로서 흥행하고 있습니다. 가령 미국 게임사 밸브는 자사 게임 ‘도타2’의 세계 대회 ‘디 인터내셔널’ 총상금으로 약 280억 원을 책정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미국 팀 리퀴드에겐 122억 원이 주어졌죠. 우승 멤버 ‘쿠로키’ 쿠로 잘레히 타카조미는 지금껏 누적 상금으로만 38억 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선수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습니다. 외신 더 스코어 e스포츠에 따르면 중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인기 스타 ‘우지’ 지안 하오가 지난 2014년 팀을 옮겼을 때 발생한 이적료는 90억 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축구선수 김기희가 지난 2016년 중국으로 떠났을 때 기록한 K리그 역대 최고 이적료 74억 원을 가뿐히 뛰어넘는 규모였던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북미 NRG e스포츠에 입단한 오버워치 선수 시나트라는 1억5000만 원의 연봉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는 고작 17살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한 오버워치 선수는 해외 게임단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을 때를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거절할 수 없는 수준의 오퍼를 받았다”고.

▶ 앞다퉈 뛰어드는 거대 자본들

e스포츠 시장은 앞으로 더 발전할 것입니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거대 자본들이 앞다퉈 뛰어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추진 중인 ‘오버워치 리그’는 e스포츠 시장의 팽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버워치 리그는 각 지역 대표팀이 한 데 모여 게임 ‘오버워치’ 실력을 겨루는 e스포츠 대회입니다. 프로 축구나 야구처럼 지역 연고제를 표방하죠. 

미국 로스앤젤레스, 뉴욕, 샌프란시스코부터 런던, 상하이, 그리고 서울에 이르기까지 주요 도시에 팀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합니다. 블리자드가 상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연고지에 자신의 팀을 유치하기 위해선 약 200억 원가량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아스널 구단주 스탠 크뢴케, 뉴욕 메츠 구단주 프레드 윌폰, 뉴 잉글랜드 패트리어츠 회장 로버트 크래프트 등이 오버워치 리그 투자자로 나섰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스포츠 큰손들이 오버워치 리그에서 2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읽은 셈이죠.

다른 스포츠에서 활동하는, 혹은 활동했던 선수들의 투자도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미드필더 안드레 고메스는 최근 유럽 G2 e스포츠 투자자로 변신했습니다. ‘공룡센터’로 명성을 떨쳤던 농구선수 샤킬 오닐은 야구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 지미 롤린스, 새크라멘토 킹스 구단주 앤디 밀러와 함께 NRG e스포츠의 투자자로 변신했고요. 이밖에 릭 폭스, 요나스 예레브코 등의 전·현역 NBA 선수들도 역시 e스포츠 게임단을 창단 혹은 인수해 운영 중입니다.

▶ 주류 문화로 발돋움 중인 e스포츠

이제 e스포츠는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닙니다.

지난 7월 리그 오브 레전드 지역 간 경쟁 이벤트 ‘리프트 라이벌즈’가 대만 가오슝에서 열렸습니다. 한국·중국·대만 3개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상위 12팀이 경합해 아시아 최강 지역을 가린다는 취지였죠.

현장 취재를 위해 대만행 비행기에 탔습니다. 280만 명의 인구와 2952km²의 면적을 자랑하는 항구 도시는 지난 7월 대회 개막을 맞이해 아시아 리그 오브 레전드 팬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더군요.

대회장으로 낙점된 가오슝 전람관은 한국 코엑스나 킨텍스 등에 비견할 수 있는 전람회장입니다. 약 4000명의 현지 팬들이 4일 동안 이 전람관을 가득 채우며 열광적인 대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축사는 천쥐 가오슝 시장이 맡았습니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대모이기도 한 그녀는 만원 관중 앞에서 “프로팀 선수들이 가오슝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만팀 경기를 눈여겨보았다. 오늘 중국과의 결전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67세의 천쥐 시장이 실제로 리프트 라이벌스를 시청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장이 축사를 자청하고, 자국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니 대만인들의 e스포츠 사랑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만은 e스포츠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나라입니다. 지난 2016년에는 차이잉원 총통이 직접 롤드컵 발대식에 참여해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죠.

그들의 e스포츠 사랑은 이번 대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전람관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산둬상권은 대회 개막에 발맞춰 승강장 전면에 대형 광고판을 부착했습니다. 현지인은 물론, 저처럼 초행길인 사람들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게요. 도심을 가로지르는 경전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사전 준비 덕에 가오슝에서 열린 첫 리그 오브 레전드 국제대회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그 속도는 더디지만, 종주국인 한국에서도 e스포츠는 점차 주류 문화로 인정받는 추세입니다. 지난 2014년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롤드컵 결승이 열렸습니다. 무려 4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모여 한국 삼성 화이트와 중국 로열 클럽의 맞대결을 지켜봤죠. 다른 메이저 스포츠에서도 어려워할 만한 규모의 관중 유치에 성공한 셈입니다.

그로부터 약 3년이 흐른 지난 8월26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2017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롤챔스) 서머 스플릿 결승전이 열렸습니다. 현장은 만원을 이뤘고, 결승에 진출한 두 팀 SK 텔레콤 T1과 롱주 게이밍의 관련 머천다이징 상품 판매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기존 메이저 스포츠 못잖은 사랑을 받는게 e스포츠입니다.

▶ e스포츠는 글로벌 황금소다

수년째 ‘세계 최고’ 타이틀을 방어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은 외국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한국 기성세대로부터는 ‘그딴 것도 스포츠라 부르느냐’는 가시 박힌 말을 듣지만 e스포츠가 젊은이들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은 국외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다시 7월의 대만으로 돌아가 얘기를 이어갈까요. 앞서 말했듯 팬 미팅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외신은 한국 선수와 단 10분이라도 단독 인터뷰를 갖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외국 기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외국 슈퍼스타가 방한했을 때 기자들이 “두 유 노 김치”나 “두 유 노 지송 팍” 등 방한 목적과 관계없는 질문을 던져 눈살을 찌푸린 게 한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e스포츠에선 한국 선수들이 그런 질문을 받더군요.

대회 첫날 한국의 SK 텔레콤 T1이 대만 최강팀 플래시 울브즈를 꺾고 믹스트룸에 입장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경기 내용과 관련해 질문할까 했는데 대만·중국 취재진의 질문공세가 멈추지 않아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대만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부터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무엇인가”같은 질문까지. 경우에 따라선 선수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질문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그들에겐 ‘페이커’나 SK 텔레콤 T1이 쉽게 볼 수 없는 ‘월드스타’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귀중한 질문 시간을 빼앗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질문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심지어 당사자인 한국 선수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에 얼떨떨해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에서 2년간 활동해 중화권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던 kt 롤스터 ‘폰’ 허원석도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SK 텔레콤 T1 ‘뱅’ 배준식은 “한국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알아봐주시는 분이 없는데 외국에서 이렇게까지 아는 체를 해주시니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014년 세계무대를 제패한 ‘마타’ 조세형은 2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최근 쿠키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겨루는 걸 보면서 e스포츠 시장의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음을 체감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은 인연이 있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다른 나라 시장보다 규모가 크고 마케팅이 활발해요. 상업적으로 활성화돼 수익 창출 구조도 훌륭하고요. 한국에서도 수입이 적은 건 절대 아니지만 중국이 조금 더 큰 건 사실이에요”

조세형은 외국에서 활동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던 부분이 있는지 묻자 이와 같이 답했습니다.

“저는 사실 중국에서 ‘용병’이었잖아요. 외국에 나가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넓어졌어요. 반드시 중국이 아니더라도 유럽이라든지, 요즘엔 브라질, 일본 등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도 있죠”

[기획] 두 유 노우 페이커?

인기 스타 ‘페이커’ 이상혁도 “처음 프로 데뷔했을 때보다 많은 한국 선수들이 고액 연봉을 받고 해외로 이적하는 것을 보며 e스포츠 시장이 커지고 있음을 체감했다”고 답변했습니다.

“트위치 등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국가 팬분들이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것, 개인 방송의 시청자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e스포츠 시장의 규모 확장을 몸소 느꼈다”는 게 이상혁의 보충 설명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e스포츠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 봄·가을이면 해외 e스포츠 게임단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지훈련’을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이들에게 한국은 ‘e스포츠 메카’입니다. 때문에 비시즌 기간 동안 한국 팀과 맞붙으면서 자신들의 실력을 점검하고, 배움을 얻기 위해 방한합니다. 그만큼 한국은 e스포츠 시장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임요환이 아침 TV 프로그램에서 잠재적 살인마 취급을 받던 때로부터 1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1번하고도 반절 가까이 변하는 동안 선수들의 국제 위상, 대중적 인지도, 금전적 가치 등은 몰라보게 상승·팽창했습니다.

이제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한 가지인 듯싶습니다. 바로 한국 기성세대가 e스포츠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게임은 정말 나쁘기만 한 걸까요?

우리는 정말 이대로 황금 소를 멸시하고 방치해도 괜찮을까요?

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