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카드] 아시안게임에 테란 브금(BGM)이 울려 퍼졌다

기사승인 2018-09-01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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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1 테란 배경 음악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게임 음악이다. 소싯적 스타크래프트1 좀 해본 이라면 누구나 듣는 순간 피가 끓어 오른다. 해외 유튜브 채널에선 이 음악을 “한국 국가(國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웅장한 기타 리프가 아시안게임 현장에 울려 퍼졌다. 30일(한국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마하카 스퀘어 브리타마 아레나에서 그랬다. 평소 인도네시아 농구 팀 홈 코트로 사용됐다던 이곳은 이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시범 종목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2 경기장으로 쓰였다. 그리고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테란 배경 음악이 흘러나왔다.

e스포츠가 아시안게임 최초로 시범 종목에 편성됐다. 게임을 스포츠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반대 여론도 거셌지만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는 게임을 스포츠로 인정했다. 그 결과 리그 오브 레전드, 스타크래프트2, 아레나 오브 발러, 클래시 로얄, PES 2018(위닝 일레븐), 하스스톤 등 총 6개 종목이 아시안게임에 발을 들였다.

시범 종목 e스포츠는 곧 뜨거운 감자가 됐다. 리그 오브 레전드 국가대표 선정 조건을 두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e스포츠 종목 병역 면제 여부는 지금까지도 각 매체 디지털 콘텐츠 팀 또는 온라인 뉴스 팀의 쓸 만한 PV(페이지 뷰) 팔이 수단이다. 체육계 관계자는 “시범 종목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토록 염원했던 e스포츠 공중파 데뷔도 이뤄졌다. SBS와 KBS가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를 생중계했다. 뒤늦게 편성표를 되바꾼 MBC도 간은 살짝 봤다. 대회 개막 전부터 수십 개 매체가 ‘페이커’ 이상혁의 화려한 프로필을 보도했다. 오성홍기 십여 개가 나부꼈던 브리타마 아레나 기자실 지분율 1위는 중국 기자단이었지만 2위는 한국이었다.

뜨거웠던 국내 취재 열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현지는 터무니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대표 팀을 반겼다. e스포츠 대회는 다른 정식 종목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렸다. 경기 장소는 달랐어도 열악한 인프라로 인해 고충을 겪은 건 같았다. 경기 지연 현상이 3차례 반복된 한중전만 언급됐지만, 인터넷 품질은 대회 내내 고르지 못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각종 악조건과 싸웠다. 대회 첫날에는 식빵으로 배를 채웠다. 주최 측은 대표 팀에게 스태프와 기자단이 먹었던 것과 같은 도시락을 줬다. 도시락은 몹시 현지의 맛과 향 그리고 비주얼을 띠었다. 가감 없이 말하건대 그날 기자가 본 한국인 중 도시락을 절반 이상 비운 사람은 없었다.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가 생각날 정도였다.

스태프나 기자단은 다른 음식을 사서 먹을 수 있었지만, 대표팀 선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대표 팀은 한국에서 공수해온 음식을 먹겠다고 건의했다. 주최 측은 도핑을 이유로 불허했다. 하지만 대회 동안 대표 팀에게 절실했던 약은 스테로이드나 아데랄이 아닌 두통약이었을 것이다.

도시락뿐이 아니었다. 모든 게 아시안게임이라고 하기엔 초라했다. 명색이 선수 대기실인데 스테이지에서 진행 중인 경기가 전부 중계되지도 않았다. 선수들은 식당 텔레비전 앞에 앉아 중국과 대만의 준결승 경기를 분석했다. 대표 팀 관계자에 따르면 국가별 대기실마다 랜(LAN)선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있었다. 우리 대표 팀이 쓰던 곳엔 없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일부 메이저 매체가 미비된 인프라 문제를 e스포츠의 정식 종목 자격 문제와 연관 지은 것은 실망스러웠다. 가령 한 매체는 27일 경기 지연 등 주최 측의 한심한 운영 현황을 보도하면서 “과연 e스포츠가 향후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을지 우려를 낳는다”고 첨언했다.

하지만 며칠 전 사격 종목에서 모니터 고장이 발생했을 때, 이후 주최 측의 미숙한 운영으로 금메달이 유력했던 선수가 울분을 터트렸을 때 해당 매체는 사격의 정식 종목 자격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마도 아시안게임 이전 열렸던 대규모 e스포츠 대회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또한 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e스포츠는 여전히 기성세대의 반감과 싸워야 하는 종목이다. 2018년 8월인 지금도 포털에서 “게임이 아시안게임에 들어가는 게 말이 되냐”는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 들어가 있지만 그렇게들 묻는다. e스포츠를 두고 “땀 흘리지 않는 게 어떻게 스포츠냐”고 묻지만, 다른 땀 흘리지 않는 스포츠들을 보며 의문을 제기하진 않는다. 현실이 그렇다.

e스포츠 태극 전사들은 가장 순수한 목적으로 뭉친 국가대표 팀이었다. 병역 혜택을 바라지 않았고 오로지 국가 명예만을 위해 뭉쳤다. 국내 대회 결승전을 일주일 앞둔 선수도 있었다. 수십억 상금이 걸린 국제 대회 출전 여부를 놓고 싸워야 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말 없이 태극마크를 선택했다. 그리고 은메달을 따서 “죄송하다”며 고개 숙였다.

경기 당일 식빵과 물로 대체하는 점심 식사, 피부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선수촌 물,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경기장의 인터넷 환경, 편히 쉴 수 없는 대기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메달 색깔보다 선수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기성세대의 고정관념과 냉대일 것이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 시대는 변한다. 시기의 문제일 뿐 e스포츠는 결국 메이저 스포츠의 울타리를 넘어설 것이다. 한국이 주춤하는 동안 돈 냄새 맡은 경제 강국들은 이미 이 온라인 유전에 시추기 수백 대를 쑤셔 박았다. 2014년부터 한국의 우수한 프로게이머 인재를 영입해온 중국이 이번 대회에서 한국을 누르고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 금메달을 딴 건 신호탄에 불과하다.

이미 아시안게임 현장엔 테란 배경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30일 조성주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애국가도 울려 퍼졌다. 이제 두 음악은 서로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퇴보할 뿐이다. ‘왜 우린 포켓몬 고 같은 걸 못 만드는가’ 같은 뒤늦은 성찰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지금은 2018년이다.

자카르타│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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