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2-07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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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폴로궁전의 2층 베란다에 서면 우리가 걸어온 좁은 골목 위로 솟아있는 시계탑을 볼 수 있다. 모로의 탑(Torre del Moro)이라고 하는 47m 높이의 이 탑은 13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델라 테자 (Della Terza) 가문의 것이었다가 교황청의 소유로 넘어갔을 때는 ‘교황의 탑’이라고 했다. 1515년 교황 레오10세가 오르비에토시에 양도했다. ‘모로의 탑’이라는 이름은 그 이후부터라고 한다.

탑의 왼편에는 중세 무렵 지었다는 팔라초 데이 세테(Palazzo dei Sette)가 연결돼있다. 팔라초 데이 세테는 1996년 보수공사를 마쳤고, 2층에는 시타즐로 국제협회가 들어있다. 탑에 걸려있는 시계는 1875년에 제작된 것이며, 탑에 걸린 2개의 종 가운데 하나는 18767년 포폴로궁전에서 옮겨온 것이다. 작은 종은 안드레아스 성인의 탑에서 옮겨온 것이다.

모로의 탑은 타원형인 오르비에토 마을의 장축과 단축이 서로 만나 세란치아(Serancia), 코르시카(Corsica), 올모(Olmo) 그리고 스텔라(Stella) 등 4개의 구역으로 나누는 교차점에 위치한다. 건축역사학자 알베르토 사톨리(Alberto Satolli)는 시민권력, 경제력 그리고 종교의 힘이라고 하는 중세의 자유지방자치의 세 가지 힘의 원천이 되는 구역이 조화를 이뤘던 오르비에토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고 했다.

탑은 공개돼 있으며 올라가면 마을의 전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멀리 서쪽으로는 바다까지, 동쪽으로는 아펜니노산맥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케토나(Cetona)산과 아미아타(Amiata)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세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르비에토 시가 어떻게 확장돼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남북간 간선도로인 카르도(cardo)와 동서간 간선도로인 데쿠마누스(decumanus)의 축을 멀리는 에트루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상상할 수 있다. 

포폴로광장으로 향하는 델라 코스티투엔테 거리를 향한 모로의 탑 벽면에는 중세 자치 시절 벌어졌던 모날데스키(Monaldeschi) 가문과 필리페스키 (Filippeschi) 가문 사이의 혈투에 경종을 울리는 명판이 붙어있다. 단테의 ‘신곡-연옥편’의 한 대목이다. 

“무정한 사람이여, 와서 봐라! 몬테키와 카펠레티를! / 모날디와 필리페스키를! 이들은 벌써 / 슬퍼하며 떨고 있지 않느냐!(Vieni a veder Montecchi e Cappelletti, / Monaldi e Filippeschi, uom sanza cura, / color già tristi, e questi con sospetti!)” 

단테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베로나의 원수가문과 오르비에토의 원수 가문을 인용한 것이었다.

모로의 탑이 있는 네거리에서 대성당 방향을 보면서 오른쪽 길, 코르소 카부르(Corso Cavour)을 따라가다 보면 널따란 광장, 피아차 델라 레푸블리카(Piazza della Repubblica)가 나타난다. 시민궁전(Palazzo Comunale)과 성 안드레아 교회가 있다. 오르비에토의 시민정부는 1157년 하드리아누스 4세가 교황의 세습범위 안에서의 자치정부를 인정할 때까지 존재했으며, 그 이후로도 산발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시민궁전은 1216년에서 1219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화재로 사라지고 1255년에서 1276년 사이에 재건됐다. 그 뒤로도 영락을 거듭하다가 1515년 시민의 종탑이 무너지면서 재건하기로 하였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1573년에 이르러서야 이폴리토 스칼차(Ippolito Scalza)가 안토니오 다 산갈라토(Antonio da Sangallo of Younger)의 디자인에 따라 재건을 시작했다. 기존의 건축재료를 다시 사용해, 1층에는 7개의 아치를 둔 로지아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아치는 이중의 기둥을 두고 있어 건물의 중심이라고 할 것이며, 중앙의 아치는 가리발디거리로 연결된다.

시민궁전 오른쪽으로 성 안드레아교회가 있다. 이 장소에 교회가 처음 들어선 것은 오르비에토 사람들이 볼세나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8세가 1013년에 성 안드레아 교회를 봉헌했다고 성소의 문에 기록돼있지만, 아마도 12세기경에 재건됐을 것이다. 1926년 11세기에 지은 교실이 무너지면서 지하에 있는 고대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발견됐다. 발굴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곳이 에트루리아의 중심부였음을 나타내는 오래된 구조의 잔해가 드러났다.

12세기 무렵부터 교회 앞 광장에서는 중요한 행사가 열렸는데, 교회의 옆면 현판에는 1)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1216년에 제4차 십자군을 발표한 사실, 2)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3세가 페테르 파렌조(Peter Parenzo) 성인의 시성식과 코트니의 페테르 2세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여기서 임명한 사실, 3) 1281년에는 교황 마르틴 4세가 나폴리왕 찰스 1세가 입회한 가운데 대관식을 여기서 거행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있다.

교회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재건을 거듭했다. 교회의 오른편에는 원래 시민탑(Torre Civica)이 있었으나, 교회의 종탑으로 사용하기 위해 1216년에서 1220년 사이 교회로 이관됐을 것이다. 교회의 내부는 화강암으로 된 5개의 기둥이 측면통로와 본당을 구분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12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조각품과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일부 작품들은 보관상태가 좋지는 않다. 두 개의 제단화는 체사레 네비아의 작품이다. 

모로의 탑에서 다시 오르비에토 대성당으로 가는 두오모길(Via Duomo)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작은 광장이 나온다. 공식적으로는 필리포 안토니오 구알테리오(Filippo Antonio Gualterio)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오르비에토 사람들은 간단하게 작은 ‘적십자광장’ 혹은 ‘작은 성 요셉광장’이라고 한다. 광장에서 두오모로 나가는 길모퉁이에 8각형의 살색건물이 서 있다.

오르비에토에서 나는 돌로 지은 바로크양식의 이 건물은 웅변술을 가진 목공들의 길드인 코로포라지온 데이 팔레냐미(Corporazione dei Falegnami)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두오모교구 소속이다. 1652년 오르비에토의 수호성인으로 정한 예수의 아버지 성 요셉에게 헌정됐다. 예수의 아버지에게 헌정된 교회치고는 내부가 소박하다. 정면의 제단화는 필리포 날디니(Filippo Naldini)가 1773년에 그린 것이다.

성 요셉의 직업이 목수(木手)냐 석공(石工)이냐를 두고 교회의 교리 전문가, 역사학자, 그리고 언어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여전하다. 그리스어로 적은 성서에 나오는 단어 텍톤(tékton)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하지만 오르비에토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건축과 관련된 직업이라고 하면 돌이나 나무로 하는 작업이 지루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3월 19일에 열리는 성요셉 축제에서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사람에게는 ‘명예로운 장인(Artigiano ad honorem, 아르티기아노 아드 오노렘) 칭호를 부여하고, 황금으로 만든 작은 비행기(Pialletto d'Oro, 피알레토 도로)를 수여한다. 

자유시간을 이용해 오르비에토 구시가지를 두루 구경하다가 조금 시간을 남겨 카페에 들었다. 오르비에토의 커피도 맛보고 화장실도 다녀오기 위해서다. 에스프레소는 진하고 향도 강했다. 화장실에서는 돈을 받고 있었는데, 카페의 영수증을 보여주면 통과다. 약속장소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모두 가까운 건물의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알았는데, 막상 버스가 도착했을 때 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쏟아지는 비를 피하면서 무언가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언덕을 내려와 버스에서 내렸더니 역시 푸니쿨라가 기다리고 있다. 비오는 것만 빼면 운이 좋다. 푸니쿨라는 다시 지하터널을 통해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중간에 아래에서 올라오는 푸니쿨라와 교행하기 위한 구조가 있다.

오르비에토를 떠나면서 단체여행의 한계를 새롭게 느낀다. 오르비에토의 그 유명한 지하터널은 구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일행이 버스를 기다릴 때 같이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바로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오르비에토 동굴공원의 가이드 투어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오르비에토의 지하도시는 1200개 이상의 통로, 회랑, 우물, 계단, 채석정, 지하실, 수조, 그리고 작은 광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지하동굴의 역사는 멀리 2500년전 에트루리아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하 통로는 절벽 아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출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적이 내습해 포위된 상태에서 안전하게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도시가 화산암의 일종인 응회암 위에 건설돼 있어 쉽게 지하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보았던 오르비에토 구시가지의 산 안드레아 교회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깊이가 36m나 되는 우물이 있는 포르조 델라 카바(Porzzo della cava)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안타깝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네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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