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2-12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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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반 오르비에토를 출발하여 아씨시(Assisi)로 향한다. 아씨시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중간에 식사를 하고는 2시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식당에 도착하기 전 40분 동안 이탈리아의 역사를 들려줬다. 로물루스형제가 로마왕국을 세운 것부터 오늘의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3000년의 역사를 느낌 있게 요약했다. 참 대단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줄기가 오락가락한다. 봄을 재촉하는 비다. 그 사이에 비가 꽤 내린 듯 흙탕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린다. 

움부리아(Umbria)지역의 페루자(Perugia)주에 속하는 아씨시는 2016년 기준으로 2만8299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1208년 프란체스코수도회를 창설한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난 곳이며, 가난한 수녀회를 창설한 클레어 성녀(Chiara d' Offreducci, 키아라 도프레두치)와 19세기 슬픔의 성모의 가브리엘 성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아드리아해를 통해 이주해온 움브리(Umbri) 사람들이 아씨시 부근의 티베르(Tiber) 계곡에 자리 잡았다. 기원전 450년 무렵에는 에트루리아사람들로 교체됐다. 기원전 295년에 센티넘(Sentinum) 전투를 승리로 이끈 로마사람들이 중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게 됐다. 성벽, 포럼(지금의 시민광장, Piazza del Comune), 극장, 원형극장, 미네르바신전(지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 등의 로마유적이 남아있다. 

서기 238년에 루피노(Rufino) 주교가 기독교를 전했다. 서기 545년 동고트의 토틸라(Totila)왕이 쳐들어와 도시 대부분을 파괴했다. 서기 568년부터 774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한 게르만족, 롬바르드의 통치를 받았다. 이 기간 움브리아지역은 프랑크족인 스폴레토 공작령에 속했다. 11세기 무렵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이 맞설 무렵에 신성로마제국 편에 서는 기벨린(Ghibelline)세력이 아씨시를 지배했지만, 12세기 말에는 교황편에 서는 구엘프 페르자(Guelph Perugia) 세력에 포함되면서 교황령에 속하게 됐다.

아씨시하면 역시 프란체스코성인을 떠올린다. 1181년말 무렵 비단상인인 아버지와 프랑스 프로방스의 귀족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버지 덕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프란체스코는 투르바르도르(Troubadour)라고 하는 음유시에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장사를 하다가 찾아온 거지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는 바람에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고서부터 삶에 변화가 생겼다. 

1202년 페루자로의 원정대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콜레스트라다의 감옥에 수감됐다. 아버지가 내준 보석금으로 석방돼 아씨에 돌아온 프란체스코는 시 인근에 있는 시설에서 나환자를 간호하는 등 영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로마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씨시에 이르렀을 때 들른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십자고상의 그리스도로부터 “프란체스코야, 프란체스코야. 가서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 가게에서 비싼 옷을 내다 팔다가 의절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입고 있던 옷까지 아버지에게 돌려준 프란체스코는 구걸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교회재건에 매달렸다. 사제 서품도 받지 않고 낡아 헤어진 옷에 지팡이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설파하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함께 움브리아의 산속을 돌아다니며 같이 수도하는 11명에 이르는 동행자들을 그는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1209년에는 이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원회칙’(Regula Primitiva)을 만들었다. 주요골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다. 동행자들과 함께 교황 이노센트3세를 알현하고, 새로운 종교질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노센트3세는 원회칙의 생활방식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고 인준을 유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을 프란체스코가 어깨로 부축해 세우는 장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프란체스코가 권력지향적이고 부유해진 교회를 쇄신할 적임자라고 본 것이다. 이에 1210년 4월 16일 프란체스코 수도회(혹은 작은 형제회)가 출범하게 됐다. 

한편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듣게 된 아씨시의 귀족여인 키아라 도프레두치(Chiara d' Offreducci)가 나서서 가난한 수녀회를 창설했다. 프란체스코는 또한 평신도들을 위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생활규범을 만들고 ‘회개하는 형제자매회’라 불리는 프란체스코 3회를 설립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탈리아 밖으로까지 활동을 넓혀갔으며, 1219년에는 프란체스코 스스로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이집트 아이유브왕국의 술탄 아카밀을 만나기도 했다. 술탄은 프란체스코에게 성지를 방문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전한다. 

또한 프란체스코회는 아이유브왕국을 이은 맘루크왕조 시기에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에 있는 성지를 양도받기도 했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선종했으며,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체스코를 시성했다. 시성식 다음날, 교황은 아시시의 세울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아 축성했다. 

시몬 디 푸치아렐로(Simone di Pucciarello)가 아씨시 언덕의 서쪽에 있는 땅을 헌정했다.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장소였기에 ‘지옥의 언덕(Colle d' Inferno, 콜레 디인페르노)’이라고 불렀던 이 장소를 오늘날에는 ‘낙원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야코포 테데스코(Jacopo Tedesco)가 설계한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수도원과 하부 성당, 그리고 상부 성당으로 구성된다. 공사는 코르토나의 엘리아스형제의 감독으로 진행됐다. 수도원과 하부 성당은 1228년 착공하여 1230년에 완공되었고, 상부 성당은 1239년 착공해 1253년에 완공됐다. 

버스에서 내려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올라간다. 성당 뒤편으로는 수도원이 있다. 문을 들어가면 하부 성당으로 향하는 넓은 경사길이 있고, 양쪽으로는 개랑이 이어진다. 개랑 벽에는 청동조각 작품이 걸려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 양식이 절충된 이탈리아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상부성당과 하부성당은 통로가 없는 네 개의 정사각형만 있는 십자가 모양의 단순한 평면 구조이며, 교회 왼쪽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을 세웠다. 하부교회의 입구는 두 개의 작은 문 위에 커다란 장미창문을 달았다. 이 장미창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맞은편으로 1270년에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성 캐서린 예배당이 있다. 하부 성당은 중앙의 신랑(新廊)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아치 뒤로 나있는 측면 예배당이 여러 개 늘어서 있다. 신랑에는 좌우로 각각 5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마에스트로 디 산 프란체스코라고 하는 미지의 미술가의 작품이다.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5개 장면이, 왼쪽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가운데 5개 장면이 묘사돼있다. 쇠줄로 묶은 고대의 석관은 제대 위에 모셔져 있다. 중간층에서 이중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지하실에서 1818년에 발견된 것이다. 지하에는 성인이 입던 수도복과 속옷 등이 전시돼있다.

하부 성당에서 나와 왼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상부 성당 앞의 널따란 정원에 이른다. 성당의 벽 아래로는 멀리 산등성이까지 초지가 펼쳐지고 집들이 흩어져 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산등성이에 걸렸다. 상부 성당 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언덕의 위쪽에는 젊은 날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로 붙잡히는 바람에 아버지가 보석금을 내 풀이 죽은 채 돌아오는 모습을 담은 성인의 기마상이 서있고 키 작은 나무를 심어 라틴어로 평화라는 의미의 PAX를 표현했다.

하얀색 벽돌로 된 상부교회의 전면은 거의 같은 높이의 수평 구역 두 개를 놓고, 역시 같은 높이의 간단한 박공이 올려졌다. 고딕양식의 커다란 출입구가 하나 있다. 기둥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 뾰족한 아치 위에는 장미창문을 달았다. 문 위의 벽면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크고 화려한 장미창문을 냈다. 창문 주변의 네 복음사가의 상징을 새겨 넣었는데, 창문과 함께 사각형의 구도를 만들고 있다. 박공에는 원형의 창문을 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밝은 본당의 회중석은 이랑이 서로 교차하는 4개의 내포로 된 천정으로 덮여있다. 들어가서 첫 번째 천정에는 그레고리 성인과 제롬 성인, 암브로스 성인과 아우구스틴 성인 등 4명의 라틴 교부들이 그려졌다. 두 번째 천정에는 그리스도와 프란체스코 성인, 성모와 세례 요한이 그려졌다.

본당 회중석의 양편 벽에는 천지창조에서 요셉이 형제를 용서하는 장면까지의 구약성서와 수태고지로부터 무덤에 있는 여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신약성서 32장면의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1997년의 지진으로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이 그림들은 지아코모(Giacomo), 조코포 토리티(Jacopo Torriti), 피에트로 카바리니(Pietro Cavallini) 등 치마부에(Cimabue)의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본당 세 번째 칸의 가운데 있는 이삭과 관련된 두 폭의 프레스코화는 전통적으로 젊은 시절의 조토(Giotto)가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본당 회중석의 아래쪽 벽에 그려진 28점의 프레스코화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젊은 시절의 조토가 그린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다섯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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